며느리의 작가 놀이에 대해 얼핏 들으신 어머님은 장문의 응원 문자를 주시며, 시댁 이야기도 소재 거리로 편히 쓰라고 하셨다. 어머님께서 공식적으로 허락하셨으니, 지난번 시어머니와의 동거 7일 차에 이은 2탄을 맘 편히 적어보려 한다. (이전글: 시어머니와 동거 7일 차 https://brunch.co.kr/@8planets425/22 )
어머님댁이 서울보다 추운 듯하여, 한 주간 더 우리 집에 머무시도록 했다. 지내시는 동안, 어머님은 컨디션을 잘 회복하셨다. 일주일이 지나니 집안 살림 중 불편한 것들을 하나씩 바꿔놓으시기도 하셨고 더불어 내 기분도 매일매일 바꿔놓으셨다.
동거 8일 차
주방 후드가 고장 나서 반년 넘게 사용못하고 있던 걸 어머님은 바로 알아차리셨다. 그후 평소 아시던 싱크대 사장님께 전화를 걸어 후드를 하나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셨다. 후드를 바꾼다는 게 꽤 큰 일인 줄 알고,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새 후드를 바꿔 넣는 일은 다 쓴 건전지를 제거하여 새 건전지로 교체하는 것 마냥 의외로 간단했다. 후드를 아예 안 쓸 때는 몰랐는데, 요즘 새로 바꾼 후드덕인지 고기를 구워도 냄새가 금방 빠진다.
동거 9일 차
퇴근 후 집에 오니 집이 환해졌다. LED 전등이 몇 개 나간 곳이 있었지만, 크게 불편한 지 모르고 지냈었다. 어머님 눈에는 어두워 보이셨는지, 아버님을 부르셔서 불 나간 전등을 모조리 갈아치우셨다고 하셨다. 바꿔 끼니 환해서 좋긴 했다. 하지만, 주방에 분위기 내려고 일부러 달아 둔 노란 조명도 답답하시다며 백열 led전구로 바꿔놓으셨다. 노란 조명 하나 켜두고 티타임이나 와인 한잔 하며 분위기 내는 일은 이제 없을 듯하다.
우리 집의 분위기를 담당했던 노란 조명과의 작별을 미처 다 고하지도 못한 채, 또 다른 변화를 감지하였다. 집안에 들어올 때부터 페인트 냄새가 나긴 했으나, 도대체 어디서 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순간 며칠 전 어머님의 말씀이 머릿속을 번뜩 스쳐갔다.
“욕실 문 안쪽이 물기가 닿아서 낡아졌더라. 그거 페이트 칠하면 괜찮아져.”
마음먹은 건 꼭 실행하시는 용감한 어머님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설마 했지만, 욕실 문 안쪽이 베이지 색 페이트로 반쯤 칠해져 있었다. 우리 부부는 기겁을 하고 왜 또 상의도 없이 일을 저지르신 건지 물었다. 사실 우리 집에서 어머님은 독재자 히틀러라는 별명을 가지고 계신다. 10년 동안 마음대로 하신 일들이 꽤 있어서 어느 정도 내성이 생긴 상태긴 하다.
“괜찮을지 어떨지 몰라서 일단 조금만 칠해 봤는데, 원하는 색깔이 아니어서 3번 정도 덧칠했어. 근데 계속 영 아닌 거 같은 거야. 니들 보기에도 색깔이 좀 별로지? 그치? 그래서 그냥 칠하다가 말았어. 근데 그거 다시 벗기면 돼. 걱정하지 마. 엄마가 해결할게."
평소 같았으면 노발대발, 하고 싶은 말을 잔뜩 풀어놨을 남편도 아프신 어머님이 맘에 걸렸는지, 이번엔 그냥 한숨 한번 쉬고 넘어갔다. 몸도 성치 않으셨을 텐데 쭈그린 채로 페인트 냄새 맡으시며 혼자 고군분투하셨을 모습을 생각하니, 나도 더 이상 말을 보탤 수가 없었다.
아직 이 상태 그대로다.
저녁 식사 후 주방을 서둘러 마감하고 맥주 한 캔을 들고 안방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350ml가 부족할 듯하여, 750ml짜리를 집어든 후 반 정도 원샷으로 들이켰다. 참고로 술을 즐기지도 잘하지도 못한다. 그날은 술기운을 빌어 원망하고 속상해할 겨를 없이 바로 잠들 수 있었다.
동거 10일 차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어머님은 검정 색 비닐봉지 하나를 쓱 내미셨다. 우리 몰래 아버님과 페인트랑 전등을 사러 작정하고 가셨던 을지로에서 DVD 플레이어를 사 오신 것이었다.
우리의 결혼식 동영상이 보고 싶으셨으나, DVD 플레이어가 없어서 미처 시청하지 못하셨던 날이 있었다. 마침 을지로에서 DVD 플레이어를 발견하신 어머님은 그 물건을 단번에 구매하셨다.
그날 저녁, 10년 만에 결혼식 비디오를 온 가족이 시청하게 되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오글거리는 동영상을 의외로 1시간 동안 꼬박 집중해서 보았다. (아들은 자꾸 물었다. 엄마 왜 지금이랑 다르냐며. 얼굴도 몸도 심지어 목소리도 다른 그 여자가 나도, 아들도 몹시 낯설었다.)
영상 속 우리는 모두 참 젊고 행복해 보였다. 뭐가 그리 좋은 지 실실 웃어대는 신부 뒤로 눈물을 훔치는 친정엄마도 보였다. 신랑 신부를 포함하여, 양가 부모님, 그리고 돌아가신 할머니의 인터뷰도 있었다. 할머니를 보자마자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그리웠던 할머니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정말 더없이 행복했다.
“ 기억나지? 그때, 우리 축가 불러주셨던 분이…"
몇몇 특이한 해프닝을 추억하며, 오랜만에 배꼽 잡고 박장대소하다 눈물까지 났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가 금세 또 숨넘어갈듯한 웃음이 퍼졌다. 온몸이 벌겋게 상기된 채 알코올 없이도 순간의 기분과 감정이 모두 세밀하게 느껴지는 묘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