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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눕 Jan 01. 2024

나의 기침이 민망하지 않은 공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즐거워요.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기침 탓에 사무실이건 식당이건, 길을 걷는 중에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자다가도 한번 터지면 멈추지 않는 기침에 나머지 식구들과 위층 사람들이 깨기라도 할까, 이불로 입을 틀어막아 날카로운 기침 소리를 낮고 뭉뚝한 소리로 바꾸려 안간힘을 써본다.  그렇게 내 기침은 한동안 어느 장소에서건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멈추지 않는 기침으로  오후 병가를 내고 병원을 찾았다. 오랜만이다.  내 기침이 민망하지 않은 공간에 들어선 순간이 낯설면서도 반갑다. 이 공간에서 만큼은 기침이 민망하지 않다. 그 공간에는 나와 함께 기침을 해 주는 누군가가 있고 기침으로 인해 병원에 와 있다는 인과관계가 왠지 모를 편안함을 더해준다.


마스크 속 내 기침은 더 이상 민망하지 않았지만, 예약 없이 찾은 병원은 한없는 대기를 안내했다. 대기 50분이 지났으나 내 이름 석자는 진료모니터에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심묘구. 박옥이. 이레 님과 같은 독특하고 예쁜 이름이 내 눈길을 사로잡아 기다림의 지루함을 덜어준다.


심묘구님은 어떤 분일까?

이름이 불려지기 직전까지, 그녀 혹은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상상 속의 인물을 실제로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재미있다.

 

진료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바라보니, 아이들이 보인다. 어린이 한 명은 책을 정독하고 있느라 아빠가 세 번 이름을 부르는 그제야 책을 내려놓는다.  얼마나 재밌는 책을 읽고 있었길래, 책에 푹 빠졌을까? 참으로 바람직한 어린이의 모습이라며 아이의 부모가 부러워지는 찰나, 눈길을 사로잡는 또 다른 무리의 아이들이 보인다.

  

남자아이 세 명이 무음 티비앞에 옹기종기 모여 무언가를 흥미롭고 재미있게 응시하고 있다. 턱을 반쯤 들어 올려 입을 벌리고 있는 아이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미소가 새어 나올 것 같은 올망졸망 귀여운 표정이다.  일제히 말 한마디 없이 모니터에 집중하던 그때, 그들 중 한 명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참다 참다 새어 나온 웃음은 더욱 유쾌하기 그지없다.  나머지 두 명도 그제야 소리 내어 키득거린다.  


'참 예쁘다.'

세 아이들의 표정과 웃음소리가 어찌나 밝고 예쁜지 그들을 한참 물끄러미 바라본다.  티비가 이토록 큰 행복을 아이들에게 선사한단말인가?  아파서 병원에 왔을 텐데, 이리 해맑게 웃어주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우리 집 어린이의 티비 시청에 관하여 잠시 너그러워지고 싶은 마음이 몰려온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표정에 반해버렸던 나와는 달리, 아이들이 끄럽다고 소리를 지르시는 할머니도  등장하신다. 그리고 그 소리에 엄마는 쉬쉬거리며,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기 바쁘다.  아이들의 행복한 표정이 읽히지 않을 만큼, 할머님은 많이 편찮으셨으리라


대기 한 시간째 드디어 내 이름이 화면 속에 자리 잡았다. 1시간 20분쯤 지났을까? 진료실에서 의사 선생님이 황급히 뛰쳐나오신다. 그렇지 않아도 진료실 문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는 동안, 좀처럼 보이지 않던 의사 선생님이 궁금하던 찰나였다.  볼일을 마친 그는 이내 총총걸음으로 다시 진료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다음 환자의 이름이 불린다.


원 없이 기침해도 민망하지 않은 공간에서 한 시간 넘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 꽤 즐거웠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매력적인 이름의 심묘미 님을 알게 된 것도.


장난스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표정을 관찰하는 일도.


총총걸음의 궁금했던 의사 선생님을

마침내 진료실 안에서 마주하는 일도.


모두 별일 아닌 단순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나, 왠지 모르는 즐거움이 느껴졌다.  마치, 심심한 평양냉면이 맛있게 느껴지는 느낌이랄까?


그날, 공간 안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을 보며 호기심으로 간질 & 몽글해지는 내 마음이 좋았다.


생각해 보니, 요즘 부쩍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그렇다. 여자 남자, 아이 어른, 장애 비장애인 할 거 없이 그 모습 그대로 귀하지 않은 모습이 없다.


특히, 아침 출근 시간 횡단보도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만날 때마다 얼마나 반가운지, 이제 조만간 인사를 건넬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누구이고

각각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마흔이 훌쩍 넘은 여자에게 왜 이제야 이런 호기심이 발동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요즘 사람들이 좋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몹시 궁금하다.


+  구독자님들! 지난 한 해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동이고 감사했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Photo by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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