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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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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리 Sep 09. 2018

동생의 후루트링

사물일기 01

창고형 매장 트레이더스에서 530그램짜리 두 봉지가 한 묶음에 11,980원이라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켈로그사에서 1963년에 처음 판매하기 시작한 후루트링은 알록달록한 네 가지 색상에 상큼한 과일 향과 달콤하고 바삭한 맛을 지닌 동그란 링 모양의 시리얼이다. 3분의 1은 옥수수가루이며, 밀가루 19퍼센트와 귀리분 약간으로 만들어져 다양한 비타민도 함유되어 있어서 우유를 부어 아침식사로 많이 활용된다. 켈로그사의 다른 시리얼과는 달리 국내에서 파는 곳을 찾기 쉽지 않고 약간 비싼 편이라 트레이더스에서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한 박스를 뜯어 국그릇에 가득 담고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시원한 우유를 부었다. 후루트링과 가장 비슷한 식감의 우리나라 과자는 앵두콘이다. 앵두 모양의 동그란 뻥튀기인데, 가볍고 알록달록하고 바삭하며 과일향이 난다. 레인보우스낵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후루트링도 가벼워서 우유에 동동 뜨는데, 빨강, 주황, 노랑, 초록의 네 가지 색깔 때문에 우유가 갖가지 색으로 물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새콤하고 달콤한 향이 강렬하게 퍼지는데, 한입 크게 떠 바삭하고 동그란 식감을 즐기며 씹다 보면 네 가지 색깔은 그냥 색깔일 뿐 맛은 다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리얼을 사면 처음 몇 번은 자주 먹지만 이내 둘둘 말아 구석에 박혀 잊히고는 한다. 한 봉지를 다 먹기도 전에 다른 시리얼이 먹고 싶어져서 아몬드 푸레이크나 코코볼을 사고는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원래 샀던 시리얼은 눅눅해져 못 먹게 된다. 그래서 커다란 한 봉지가 아니라 두 봉지로 나누어 판매하는 트레이더스의 마케팅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뜯어 놓은 후루트링을 보면 마음이 조급해지지만, 새 박스에 담긴 후루트링을 보면 마음이 든든해진다. 시리얼은 처음 뜯었을 때가 가장 맛있다. 가장 바삭하고 향긋한 후루트링을 즐길 또 한 번의 시간을 예고하는 다른 한 상자의 후루트링은 나의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그 다른 한 상자의 후루트링을 동생의 이삿짐에서 발견한 것은 후루트링의 존재를 거의 잊어갈 때쯤이었다. 동생은 한 달도 더 전부터 짐을 싸기 시작했고 2주 전에 독립해 나갔다. 동생의 짐은 많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 동생 세 식구가 부대끼며 살던 좁은 집에서 가지고 나갈 것이란 이불과 옷, 그릇과 숟가락 정도였다. 탑차 한 대에 아저씨 한 분이 짐을 옮기는 데에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경기도의 위성도시에서 서울로, 동생은 에어컨이 달린 작은 방 한 칸의 싱글 라이프를 기대하며 맥북이 담긴 가방을 꼭 끌어안고 탑차 조수석에 앉아 미아동으로 떠났다.


동생 집의 방바닥을 닦고 이삿짐을 정리했다. 한 여름에 이사를 하게 되는 바람에 땀을 뻘뻘 흘렸지만, 새로 이사한 집에서는 에어컨에서 부는 찬바람이 쾌적했다. 박스를 뜯으며 집에서 보았던 물건들을 발견했다. 가족의 집에서는 잊혔던 물건들이지만 동생의 집에서는 새로이 쓰이게 될 것들이었다. 그러다가, 이삿짐 속에서 후루트링 한 상자를 발견했다. 나는 그 후루트링 한 상자가 못내 아쉬워 동생에게 면박을 줄까 했지만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대충 정리가 끝나고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가며 동생이 우유를 사야한다고 말했다. 동생의 텅 빈 냉장고를 채우려면 아주 큰 우유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식탁에는 알록달록한 후루트링이 투명한 플라스틱 밀폐용기에 담겨있다. 처음 뜯었던 그 후루트링이다. 여름철이라 이내 눅눅해질 만도 한데, 이 밀폐용기는 너무 잘 만들어져서 시리얼의 첫 번째 매력인 바삭함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이 먹다 남은 후루트링의 존재가 다른 한 박스의 후루트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동생의 이삿짐에 섞여 있던 후루트링 한 상자, 헌 것들 가운데 가볍게 빛나며 다양한 색감을 자랑하던 후루트링 한 상자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동생의 집에는 이런 밀폐용기가 없는데, 아마도 동생의 후루트링은 지금쯤 눅눅해졌을 것이다. 곧 트레이더스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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