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에서 초여름을 향하는 부산의 송상현 광장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복잡하고 바쁜 삶을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생각이라는 것은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래 전 책을 덮었고, 시각과 청각을 중심으로 한 빠르고 자극적인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모두가 익숙해지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쇼츠라고 더 짧은 영상 정보가 지식 수집의 주요 통로가 되어버렸습니다. 바쁘고 힘든 삶이 모두를 그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생각의 힘은 늘 사람들을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조금 늦을 수는 있지만 다시 되돌아 나오는 수고를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송상현 광장은 생각의 힘을 키워주는 곳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그러합니다.
1590년 일본 통신사로 갔던 서인 황윤길과 남인 김성일은 일본의 침략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선조에게 보고합니다. 황윤길은 조만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주장하고, 김성일은 일본은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대가 되는 주장을 합니다. 후일 남인 김성일은 선조와 백성들에게 괜한 근심을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한 발언이었다고 했지만 이는 붕당 정치의 폐해라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즉 서인 진영에서 일본의 침략을 말하자 그와 반대되는 남인 진영에서 침략은 없다라는 주장을 펼친 것으로 평가된다는 말입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정치가 반대를 위한 반대로 결국 나라와 백성을 힘들고 어렵게 만들어 버린 임진왜란 직전의 일입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2024년의 우리는 양분된 진영논리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사는 처지에 있습니다. 혼돈의 국제 정세에도 우리는 서로 자기 세력의 안위를 논하는 진영논리의 끝판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진보와 보수,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은 사람의 관점에서 그러합니다. 불안한 국제 정세, 성큼 다가온 경제 위기의 징후에도 서로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할 노력보다는 서로의 이익을 위한 정쟁이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충절을 보여준 송상현 동래부사의 고귀한 정신을 생각하고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준비되지 못한 나라와 그 민족이 겪어야 할 불행과 고통을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송상현 광장은 지나간 시간에서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곳입니다.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정쟁이 아니라 서로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선거 때만 되면 정확히 두 진영으로 나뉘어 싸우는 모습이 연출되는 진영논리는 그만 되어야 합니다. 현실 정치라는 부분에서 양쪽 진영의 정책 차이도 이제 거의 없기도 합니다. 서로 싸울 것이 아니라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송상현 광장은 1592년 5월 25일, 결사항전으로 동래성을 지키려했던 동래부사 송상현의 이름을 딴 광장입니다. 임진왜란의 동래성 전투를 이끌었던 송상현 장군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광장이자 공원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모너머 고개로 불리던 곳으로 부산의 외부와 내부가 나뉘는 경계선이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은 공원으로, 이곳을 들르는 사람들에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합니다. 도심 한가운데서 역사적 의미와 자연의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마주 보고 모이지 않는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희망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광장은 국가나 지방의 정책 전파, 일반 대중에게 전하는 명령의 알림, 그리고 형식적으로나마 민의를 전달하거나 모으는 곳이었습니다. 한국의 민주화 시기에는 집회 혹은 시위로 시민 개개인의 집단적 정치적 의사 표현이 이뤄지던 곳이었습니다. 다수가 모인 만큼 공동체의 이익과 정의에 관한 토론의 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매스컴과 SNS의 발달로 사람들의 뜻을 모으는 광장은 사이버 공간으로 제한되어가고 있습니다.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는 문화가 형성되었으며, 공동의 이익보다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우선하는 문화도 형성되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 이후로는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공동의 이익이나 목표로 한데 모이는 일은 거의 사라져 버렸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공동의 목표로 한데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이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거리응원 이후 한국의 진보 언론들은 ‘한국에 광장 문화가 돌아왔다’라며 민주화 운동 이후로 한동안 사라졌던 시민들의 의견 발산이 다시 자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특정한 이익집단의 위력시위가 아니라 서양의 광장 문화처럼 일반 시민 개개인의 여러 주장이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문화가 정착되었다고 평가를 한 것입니다. 과거 집회를 ‘데모’라며 평가절하하는 보수우익 성향의 시민들도 자기 이익이나 정치 주장을 펴기 위해서 광장에 모여서 촛불이나 태극기 들고 행진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넓은 장소라는 뜻을 가진 광장의 본 의미를 충족시키기는 모자란 것 같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의 생각을 한데 모으는 일이 현저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끼리끼리 모이고, 자기만족 추구의 이기적인 성향들과 함께 모두의 안녕이나 이익보다는 개인, 집단의 안녕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성향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법 없이 살았던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는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법대로 하자는 목소리가 세상을 울리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 목소리 크기가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옛날이 좋았다는 말에는 항상 ‘라떼는 말이야’라는 비웃음이 따라오는 세상입니다. ‘말은 줄이고, 지갑을 열라’라는 말이 가장 큰 삶의 덕목이라 강요당하는 50대 중년에게는 분명 그렇습니다.
그렇게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돌아보면 오래 지 않은 과거는 내 이익, 내 목소리만 중히 여기지 않았던 우리가 있었습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그렇습니다. 투기 세력에게는 비난을 퍼부을 줄 알았고,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도 지금보다 더 나았습니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부자에 대한 동경도 약했고, 상대에 대해서도 더 너그러웠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생겨난 젠더 갈등, 세대 갈등, 계층 간의 갈등이 심화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어려운 시기이지만 서로 돕자는 말은 잘 들리지 않습니다.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세상임에도 개인의 안녕은 스스로의 몫이라고 말합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
어려운 시기이기에 각자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퍼지는 세상입니다. 각자도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잘 지키고 만들어 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서로 돕지않았다면 야생의 맹수에게서, 자연의 재앙 앞에서 우리를 지키고 만들어 올 수 없었을테니 말입니다. 문명사의 아픔인 전쟁도 그렇습니다. 잘 조직되고 협력할 수 있었던 이들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모두의 안녕을 위해 함께 만나고, 고민할 수 있는 광장을 다시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국내 최대의 광장, 송상현 광장은 수난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곳이며, 힘든 미래를 함께 극복하며 살아갈 방법을 논할 수 있는 너른 공간이기도 합니다. 다시 광장에서 우리들의 삶을 함께 고민할 시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