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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음 May 27. 2024

'나'에 대하여

지금 이 시간


  지금 이 시간이면 나는 사무실에서 이것저것 자료를 출력하면서 조금은 느긋하게 업무를 하고 있을 것이다. 별로 힘들지 않은 일과 2년의 경력으로 월요병이라는 병도 없이 즐겁게 출근해서 즐거운 하루를 만들기 위해 활기차게 기지개를 켜고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기 위해 웃고 있을 것이다. 하루 일 선(善)을 추구하면서 누구에겐가 도움이 되고자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내게 무엇인가 묻는 사람에게, 특히 나이가 들었거나 혹은 글을 몰라서 자동화기기 사용이 불가능한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려고, '에이 그런 것도 모르나'하는 심술궂은 생각을 하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줘야겠다는 예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내가 지금 이 이 시간, 불안한 마음을 안고 글을 쓰고 있다. 아니 글에 매달려 내 마음에 평화를 갈구하고 있다. 자주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글을 썼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싶을 때, 제대로 쥐어지지 않는 볼펜을 붙잡고 앞뒤 재지 않고, 떠오른 생각들을 두서없이 써내려 갔다. 불안한 마음 탓에 글씨가 삐뚤빼뚤 제멋대로 이거나 눈물이 공책을 적시기도 했다. 지금 나는 직장을 잃고 쓴다. 

  직장에 다닐 때는 직장 귀한 줄 모른다고 말한다. 나는 직장에 다닐 때도 직장을 귀히 여겼다. 그만큼 내게 능력이 없었던 탓이다. 지적허영심에 빠져 가방끈을 길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내 발 딛고 서 있는, 서 있어야 하는 현실에서 사는 데에는 실패했다. 가방끈이 길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고 늘 여기에서 몇 개월, 저기에서 몇 개월, 시급을 받는 파트타이머로 전전했다. 그때마다 나는 다른 공부를 했으니까, 하면서 나 자신을 기만하며 고고한 척, 내 삶마저 기만했다. 

  결혼 전에는 번듯한 직장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꿈꾸는 '은행'이라는 직장이. 10년을 다녔다. 돈을 만지는 일이어서 조금은 더 냉정하고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하는 일이었을까. 내 우유부단한 성격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견디기 힘들었다. 10년을 다녔는데도 정들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든 뛰쳐나가고만 싶었다. 마침 명예퇴직이 있었고, 나는 그 기회를 이용했다. 후회는 없다. 

  직장을 뛰쳐나온 후 나는 내 인생을 살기 위해, 짧은 가방끈 때문에 시궁창에 빠져 뒹굴고 있는 내 자존감을 지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대학을 선택했다. '꿈과 낭만'이 있는 대학생활은 아니었다. 꿈과 낭만을 찾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다. 대신 내 정신을 밝혀 주고 나 자신을 알게 해 주었다. 나는 못난 사람이 아니라, 그렇다고 잘난 사람도 아니지만,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 나를 사랑하는 법을 알아나갔다. 대학생활은 한 마디로 내가 하고자 했던, 자존감을 찾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자존감 회복을 하는데, 책뿐만 아니라 사람이 크게 작용했음을 밝힌다. 한 사람은 나를 가르치신 교수님이셨고, 다른 한 사람은 지금은 나의 동반자인 늦깎이 대학생으로 학과는 달랐지만, 술을 마신 내가 '아저씨, 나랑 차 한잔 해요' 하면서 기숙사 방으로 전화를 하면서 우리의 로맨스는 시작되었다. 짧은 연애와 결혼을 거쳐 딸을 낳았다. 학생이었던 남편과 결혼하면서 내 삶은 또 한 번의 폭풍우를 만났다.

  자신의 삶으로 이야기를 쓴다면 몇 권 아니 몇 십 권의 책을 쓴다고 했다. 지금 이 시간 나는 어떤 모습인가.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불안하게 흔들리는 한 자루 초이다. 그 위에서 가늘게 흔들리는 촛불이 내 마음이다. 방 가운데 한 자루의 초와 그 위에서 타오르고 있는 촛불. 미세한 바람이 불면 흔들리다가, 아무도 없이 고요함 속에서는 조용히 갸름한 몸을 태우고, 누군가 방으로 들어올 때 같이 들어온 바람으로 사정없이 꺼질 듯 흔들리다가 마침내 잠잠해지는 촛불처럼, 나는 불안한 듯하면서도 고요한 시간을 갖고 있다. 

  지금 이 시간들, 다시 오지 않을 시간에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며 글을 쓰는 나는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고자 한다.  폭풍우를 만나면 맞서 헤쳐나가는 사람이고자 한다. 내 삶을 기만했다손 치더라도, 다시 내 삶이 나 자신에 의해 기만당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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