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위해 평안함을 찾는 마케터
오후 7시 30분, 신논현역. 오늘 회식은 채용 솔루션 플랫폼 마케터 이준구 님과 함께 했다.
그로스 마케터로 재직 중이라고 들었어요. 어떻게 마케팅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대학생 때 전통적인 마케팅을 접했어요. 공모전에 참가하고 마케팅을 배우면서 프로모션 기획, 브랜드 컨셉 설정 같은 기본적인 것들을 경험했죠. 그러다 영업을 첫 직무로 정하고 일을 시작하게 됐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마케팅을 하고 싶더라고요. 그때가 2014-2015년 즈음이었어요. 온라인 시장이 급성장하고 '유망 스타트업'이라고 불리는 회사들이 하나둘씩 등장했는데 대부분 온라인 기반의 앱 서비스나 웹 서비스를 하는 곳들이었어요.
그때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디지털 마케팅'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데이터 기반으로 좀 더 근거 있는 의사결정을 한다는 거예요. 그냥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 성과를 만드는 데 가장 타당한 방법이더라고요. 그걸 보고 완전 꽂혔죠. '아, 이건 뭔가 성장성이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어요. 그 이후로는 물건도 온라인에서 사고, 그런 게 이미 활성화되어 있었으니까 이 시장이 더 뜰 거라고 확신했죠. 이미 떴는데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거고, 절대 망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디지털 마케팅에 대해 열심히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마케터가 되기까지 어떤 준비 과정을 거치셨나요?
공부가 필요하겠다 싶어서 구글 애널리틱스(GA) 독학을 시작했어요. 구글에서 제공하는 무료 강의를 들으면서 배웠고 마케팅과 관련된 자격증도 다 땄어요. 전문가 수준으로 알게 되었다고 하긴 어렵지만, 어떻게 하는지는 대충 다 알겠는 정도로 수준을 올려놨어요. 이쯤되면 이력서 써봐도 되겠다 싶었죠. 그러면서 여기저기 지원해봤는데, 말그대로 다 광탈했습니다. 현실은 녹록지 않더라고요.
특히 스타트업들은 경력자 위주로 뽑잖아요.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정말 경험이 없구나, 이 사람들이 날 뽑을 이유가 없구나’ 하고요. 그러던 중에 패스트캠퍼스에서 진행하던 마케팅 전문 교육 과정을 알게 됐는데 비용이 꽤 비싼 거예요. 대학교 한 학기 등록금 수준이었어요. 백수였던 제겐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는데 부모님께서 "지금 백수 생활을 얼마나 할 거냐. 이런 거라도 해야 되지 않겠냐."고 얘기하시면서 지원해주셨죠. 그때 디지털 마케팅에 대해서 진하게 배웠어요. 광고 운영하는 법, 데이터 보는 법 등 마케팅의 기본을 익혔죠. 그때부터 저의 커리어 방향이 명확해진 것 같아요.
준구님이 마케터로 성장하는 데 부모님 역할이 무척 컸네요. 그럼 교육 이수 후 바로 그로스 마케터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그렇진 않아요. 사실 제 이력에는 숨겨진 부분이 좀 있는데요. 마케팅만 한 건 아니고 여러 가지를 다 했어요. 이전 회사에서는 그로스 마케팅 매니저였고, 그 전 회사에서는 그로스 마케터, 또 그 이전에는 일반적인 마케팅 매니저 업무를 했고요. 스타트업에서 일했다 보니 인력이 부족하면 한사람이 다양한 일을 해야 되거든요. 상황에 따라 광고 운영이나 퍼포먼스 마케팅 관련 업무는 기본이었고, 그 외에도 제휴, 데이터 분석도 했어요. 퍼포먼스 마케팅 업무에 데이터 분석도 포함되어 있었죠. 거기에 더해 CRM 관련 업무까지 담당했었어요.
결과적으로는 현재 그로스 마케터로 근무하고 계시잖아요. 그로스 마케팅의 어떤 점이 준구님과 잘 맞으셨던 건가요?
여러가지가 있지만 생존과 직결되어 있는 점이 커요. 요즘 AI와 머신러닝으로 퍼포먼스 마케팅이 자동화되고 있잖아요. 메타나 구글 같은 주요 매체들이 소재만 등록하면 타겟팅까지 다 해주니까요. 퍼포먼스 마케터의 생명력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고 봐요. 조심스러운 이야기이지만, 현실은 객관적으로 봐야 하니까요.
그래서 전 밥벌이를 위해 살 길을 찾은 거예요. 또 그로스 마케팅이 개인적으로는 다른 마케팅보다 조금 더 재미있고요. 적성에 맞는 거죠. 제품 기획부터 마케팅까지 전반적으로 경험해볼 수 있는 것도 이점이고요. 이런 경험들이 마케터로서 조금 더 생명력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또한 개인적인 견해이지만요.
퍼포먼스 마케팅과 그로스 마케팅의 차이점을 한번 짚어주실 수 있을까요? 비교점이 있다면 지금 말씀해주신 내용이 더 이해가 될 것 같아요.
국내에서는 아직 그로스 마케팅에 대한 정의가 애매모호한 것 같아요. 많은 기업들이 그로스 마케팅이라고 하지만 Job Description에는 퍼포먼스 마케팅 업무 위주로만 노출할 때도 많거든요. 제가 생각하기에 퍼포먼스 마케팅은 주로 고객 획득(Acquisition)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그로스 마케팅은 고객 획득뿐만 아니라 유지(Retention), 수익화(Revenue), 활성화(Activation)까지 포함해요. AARRR 모델 전체를 보는 거죠.
또 퍼포먼스 마케터는 주로 광고 운영, 매체 기획, 마케팅 메시지와 소재 기획 등에 집중한다면 그로스 마케터는 제품에 관심을 가져요. 물론 회사마다 정의하기 나름이라 정확한 구분은 어렵지만, 아직까지는 많은 곳에서 그로스 마케팅을 퍼포먼스 마케팅과 동일하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마케터로서 첫 커리어는 어디서 시작하셨나요?
에듀테크 스타트업에서 시작했어요. 2년 동안 일했어요. 그때 정말 많은 걸 경험했죠. 진짜 스타트업의 모습을 처음 경험했는데 가장 재밌게 일했던 때이기도 합니다. 이것저것 다 해볼 수 있었거든요. 회사 특성상 보고 체계가 단순했어서 팀장 없이 대표와 직접 소통하기도 하고, 가능한 선에서 하고 싶은 거 다 해볼 수 있었어요. 자유도가 높아서 재밌었어요. 그곳이 제 경력 상 가장 오래 다녔던 회사였는데요. 재미있는만큼 정말 힘들었던 시기였는데, 확실히 재밌으면 힘들어도 오래 다니게 되더라고요. 지금은 재미만 추구하면서 살 수 없지만, 그때는 젊음의 패기가 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현재는 무엇을 추구하면서 지내고 계신가요?
심리적 평안함이요. 경력이 쌓이면서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1년, 2년 일하다 보니 그걸 깨달았죠. 사람은 포기하면 편하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됐어요. 가령 포기가 안 된다면 한번 큰 실패를 경험해봐야 돼요. 저는 비슷한 계기로 욕심을 버렸어죠. 아예 버렸다기 보다 집요하게 생각하는 정도를 많이 내려놨어요. 전에는 될 때까지 대여섯 번 부딪혔다면, 지금은 두세 번으로 줄였어요.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게 저한테 일을 할 때 이득이 되더라고요.
생각보다 준구님에게 큰 변화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그런 변화를 시도하기까지 업무적으로 어려운 점이 있으셨던 건가요?
일이 힘들었어요. 개인적으로 에듀테크에 다닐 때 가장 힘들었어요. 일에 대한 강박으로 스트레스가 무척 심했고 우울증도 걸렸고, 만성 스트레스로 위염, 위궤양도 생겼어요.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죠. 결국 제가 다 내려놓는 수밖에 없었어요. 남이 제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으니까요. 문제를 풀고 싶었는데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갈등이 생겼어요. 이게 오히려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되고 스트레스도 받았죠. 그래서 ‘포기하는 것도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일을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돌보면서 일을 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어요.
준구님과 같은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직장인들이 많이 있을 것 같아요. 주변에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자기만의 시도 횟수를 정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제 가이드라인은 맥스 세 번이에요. 세 번까지는 시도해 보라고 해요. 계속 얘기해 봐야 해요.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요. 문제 해결을 위한 다른 방법을 찾거나, 방법이 안 보이면 내가 살기 위한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해요. 이직이든, 회사에서 할 수 있는 일만 하든 말이에요.
세 번까지 도전해서 얻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해봤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스스로 느꼈을 때 그래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내가 생각하는 나의 최선을 다했다는 거예요.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을 다해 해봤다는 거죠. 안 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제가 생존하는 방식으로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지금은 어떤 곳에서 재직 중이신가요? 심리적 평안함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인지 궁금하네요.
채용 솔루션 플랫폼에서 그로스 마케터로 재직 중입니다. 하루하루 새로운 일이 계속 생기고 있는 바쁜 시즌인데요. 업무 범위가 작년에 비해 7배가 돼서 지금은 좀 줄여보고 있는 중이에요. 작년엔 한 사업에만 집중했는데, 올해부턴 신사업이 계속 생기다 보니까 모든 사업에 마케팅팀이 관여하게 됐어요. 갑자기 7개 사업이 한꺼번에 몰려왔죠. 그래서 우선순위를 두고 중요한 것들 위주로 하고 있어요.
제가 경험한 바로는, 이곳은 비교적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일하는 조직이에요. 업무 공유도 잘 되고,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배경 설명도 잘되는 편입니다. 막무가내로 일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서 업무는 바쁘지만, 심적으로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게 큰 장점인 회사로 생각돼요.
마케터 8년 차가 되셨어요. 그 정도의 경력이 되면 어떤 역량을 갖게 되나요?
마케터로는 8년, 회사 생활을 다 합치면 10년 정도 돼요. 중간 공백기를 빼고요. 이 정도의 경력을 갖게 되면 제 경험으로는 '달관하는 자세'를 알게 돼요.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걸 해보고 부딪혀보니까 '내가 욕심 부려서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라는 걸 알게 됐죠. 이제는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는 마인드로 바뀌었어요. 이게 꼭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일을 할 때 더 심플해지거든요. 불필요하게 일을 질질 끌지 않고 최소 조건이 갖춰지면 빠르게 실행에 옮길 수 있어요. 제 선에서 끝낼 수 있는 것들은 빨리 처리할 수 있죠.
짧지 않은 경력과 다양한 회사를 경험하며 나온 준구님만의 일하는 방법으로 느껴지네요. 여러 번의 이직을 경험하셨는데, 혹시 또 한번 이직을 하게 된다면 어떤 점을 가장 중점적으로 볼 것 같으신가요?
다음 이직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는데요. 최근에는 저의 이직의 기준이 많이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사업의 성장 가능성이나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많이 봤는데, 이제는 회사가 돈을 벌고 있는가가 가장 중요해요. 이전에 재정적인 문제로 권고사직을 당한 경험이 있던 탓에 재정 상황은 특히 중요해졌어요.
결론적으로, 회사는 반드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게 제 주요 기준이 됐고요. 투자금에 의존하는 건 위험하다고 봐요.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냉혹하고 언제든 밥줄을 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죠.
생존 수단도 어떻게 보면 숭고한 행위잖아요. 자아 실현도 중요하지만, 생존을 가장 우선시 하는 것도 중요하죠. 그럼에도 준구님에게 단 한가지의 커리어 욕심이 있다면요?
일에 대한 욕심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에요. 여전히 이 업계에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언젠가는 세미나나 컨퍼런스에서 발표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이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뭔가를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또 경력이 여러 회사를 짧게 다닌 탓에 한 곳에서 큰 성과를 만들어낸 적이 없다 보니, 뭔가를 자랑하기 애매하기도 해요. 그래서 가끔 강의 제안이 들어와도 부담스러워서 거절하고 있어요.
현재 준구님에게 일은 어떤 의미인가요?
일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 즉 생존 수단이에요. 예전에는 자아실현이나 미래를 위한 자기개발 같은 의미를 많이 부여했는데, 이제는 최대한 심플하게 생각하려고 해요.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면 오히려 복잡해지더라고요.
마케터라는 직무를 주변에 추천하시나요?
사실 대학생 때 마케팅이란 게 뭔가 있어 보여서 시작했어요. 공모전도 나가고, 운 좋게 기업 PT도 해봤죠. 그러다 보니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겨서 '마케팅을 할 거야'라고 결심했어요. 그게 쭉 이어져 지금 8-9년 차가 됐는데 이제 와서 '내가 왜 그랬지?' 싶어요.(웃음)
저는 후배들이나 대학생들에게 마케터가 되려고 할 때 한 번 더 생각해보라고 해요. 제가 지금 마케팅을 하고 있는 건 여기까지 왔으니 발을 뺄 수 없어서예요. 사업가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먼 훗날 제 궁극적인 목표는 시간을 100% 컨트롤하면서 돈을 벌고 싶어요.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요.
사실 이런 얘기를 하다 보니 갑자기 걱정이 되네요. 어디서 고소장이라도 날아올까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