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한 위로 | 전세금 돌려주세요, 욕 하지 마시고요.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의 목숨으로 돈을 벌고, 부자들은 그 장면들을 안주 삼아 비싼 술을 들이킨다 - 오징어게임 한 줄 감상평.
이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어쩌면 드라마에서나 보던 그 장면들의 잔상을 일상에서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래 전, 전세금 돌려 줄 돈이 없다고 하던 주인의 말 : "야 이 XX년아, 어쩌고 저쩌고..."
"진짜?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라며 말이다.
물론 지금도 곧이 곧대로 믿지는 않지만, 문득문득 삶의 어느 순간,
전세금을 돌려달라는 전화 너머로 나에게 욕을 하던 전세집 주인을 겪어 오던 그 시간을 생각하면, "그래, 뭘 이해하려 그래"라며
내 안의 "아쿠마 실존설"이 슬며시 머리를 든다.
상황은 간단했다,나와 어머니는 이사를 나가면서 6000만원의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아야 했고, 산더미 같은 빚을 안고 있던 집주인은 전세 보증금을 돌려줄 여력이 없었다.때문에 우리 가족이 이사 나가는 날, 이사 들어오시는 분들이 보증금을 내면, 그 돈이 고스란~히 나의 전세금으로 들어와야 했다.
프로세스는 아주 간단했다.
1. 이사 오시는 분들은 집주인에게 돈을 제때에 입금,
2. 집주인은 최대한 빨리 그 돈을 나에게 전달,
3. 나는 돈을 받자마자 빠르게 이사!
아주 간단한 게임 같지만,과정 중 하나의 과정에만 문제가 생겨도 누구 하나는 두 트럭이 되는 짐을 지고 하는 야외취침이 정해진 게임이었다.
그리고 확실한 건 이 게임의 열쇠를 풀 수 있는 건, 제일 다급하진 않지만,어쩌면 모든 돈의 흐름을 지고 있는 핵심인물 - 바로 집주인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새 입주자는 이래저래 핑계를 대며 전세보증금 입금을 미루고 있었다.
돈을 빨리 입금해달라고, 안 그러면 나와 가족들은 이사해 나갈 수 없다고 얘기하자 그들은 집주인에게만 돈을 주면 됐지, 그것때문에 우리가 돈을 못 받는 상황까지 왜 자기들이 이해해야 되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화냈다.
설상가상으로 집주인은 늘 그랬듯이 전화를 받지 않았고, 받고 나서도 자기가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어버리는 나쁜 습관 덕분에(?) 나는 이 사태를 부동산 중개인을 찾아가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집주인에게 연락하여 어떻게 조치를 좀 취해달라고 말이다.
거기서 알게 되었다.
유일한 구세주라고 느끼고 찾아간 부동산 중개인은 키득키득대며 집주인과 통화중이었다.
"ㅋㅋㅋ 어휴 지들끼리 싸우고 난리도 아니에요 ㅋㅋㅋ"
내가 뒤에 있는 것을 보고, 중개인 아줌마는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지만,나는 다 들어버렸다.
남아있는 한떨기의 인류애가 바사삭 사라지는 것 같았다.
6000만원이 안되는 전세금이 아쉬워서 "도와주세요,주인 분이 연락을 안 받아요"하며 찾아오는 내가?
아님 돈을 못 받은 전 입주자가 나가지 않으려 하자 화를 내며 당장 나가라는 새 입주자가?
아니면 무식하고 우직하게 차려입고 6000만원에 목매어 싸우는 이 서민들의 언쟁이?
나한테는 소중한 이 6000만원이 그 주인과 부동산 중개인에게는
가난한 자의 간절함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무기와도 같아진다는게,
화가 나면서도 슬펐다.
몇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나름 번듯한 대기업에 다니고 있고 그때 우리 가족의 전세자금은 지금의 연봉에도 못 미치지만, 그때만 해도 그 사건은 취준생인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바닥까지 후벼파는 일이었다.
세상의 모든 집주인들이 내가 만난 그 집주인 같지 않을 것이고, 가난이 꼭 모든 선량함을 대변하지는 않겠지만,
돈의 흐름을 쥐는 사람들의 손바닥 안에서 가난한 자들이 억울하게 자기들 끼리 싸우는 모습이 이 에피소드가 아니어도 흔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회사에서도 업무의 흐름을 쥐고 있는 리더가 불편한 소통을 조장하면 아랫사람들끼리 싸운다, 바쁘다는 핑계로 서로에게 예민해져서 다퉜다고 하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다.권력이 원활한 소통의 흐름을 막아 묵혀뒀던 스트레스를 아래사람들끼리 서로를 향한 분노로 푸는 것이다.
돈이든 정보든 권력이든 그 흐름을 쥐고 흔드는 사람으로 인해 나약한 사람들끼리의 갈등이 만들어지고 그로 인해 이 세상 상처의 총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 않나 싶다.감사한 것은 그러한 자극 덕분에 누군가는 이 악물고 노력해 더 나은 자리로 가려고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아쿠마들에게 얘기하고 싶다.
그렇게 누군가를 이유없이 괴롭히지 않아도 즐거운 일은 충분히 많다고.
언젠가는 내가 세상을 향해 날렸던 모든 화살들이 촘촘히 빠짐없이 나에게 돌아온다고.
그러니, 부디 당신도, 나도, 우리 모두 다 그냥 단순하고 행복하게 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