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한 위로 | 가난은, 가끔 조용히 상처 받는 것.
"걔는 일단 집이 잘 살아, 그래서 애가 항상 밝아. 골프도 좋아하고, 명품 좋아하고. 난 그런 애들이 좋아, 가난한 애들은 괜히 어둡고 이유없이 부자들 싫어하고...으휴...그리고 걔, 남자친구도 잘 살아, 또 걔를 엄청 사랑해줘, 매일 2시간씩 차로 출근 시켜줘.되게 순애보 스타일이야."
팀장님께서 다른 회사의 대리님 한 분을 우리 팀으로 스카웃 하고 싶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 대리님을 위와 같이 소개하셨다.
아주 묘~~하게 기분이 살짝 울적해졌다. 울적, 맞아 울적.쓰고 나니 더 확실해진다.나는 기분이 울적해졌다.
아마 두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1. 내가 못하는 것, 가지지 못한 것을 거의 다 가지고 있어서.
나는 반지하 단칸방에 엄마와 둘이 살고 있고, 이런 저런 이유로 밝긴 하나 대체로 톤다운 된 컬러들처럼 밝기보다 차분하다.살 수 없는 명품들은 안 좋아하기를, 내지는 관심없기를 택했고, 골프는 쳐본 적도 없다.
2. 그리고 부자인 그 분이 마음에 든다고 하시는 얘기를 듣고 나니,팀장님께서 그동안 내가 부자인지 아닌지를 수시로 체크했었던 시간이 떠올랐다.
"헬스장을 그 돈을 주고 끊었다고?너 부자야?하하하"
"너네 부모님 뭐하셔?부자야?"
라는 말들에 아니라고 대답은 했지만, 그런 질문들이 사실은 내가 부자인지 아닌지를 체크하려고 했던 질문이구나를 알게 되어 묘하게 서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자인 그 대리님이 밉다거나, 괘씸한 감정이 떠오르진 않는 걸 보니, 다행히 내가 이유없이 부자를 미워하지는 않는 모양이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금전적으로 원하는 만큼 성장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또 그런 말들에 이젠 더이상 흔들리고 상처 받지 않을만큼 나를 다스리는 기준이 생겼다는 걸 방증하기도 할 것 같다.
여기까지, 다아~괜찮은 줄 알았는데 사건은 그 날 저녁 터졌다.
그 날 저녁,
회사 앞으로 찾아와 준 남자친구와 오랜만에 족발을 먹기로 했다.
족발 2인분을 시키고 족발을 먹는데, 막국수도 함께 먹고 싶어, "막국수도 시킬까?"라고 여러차례 물어보곤 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막국수가 먹고 싶기보다, 팀장님의 말이 마음 한켠에 남아,
"막국수 먹고 싶어?시켜 시켜,시키면 되지 뭐"라는 남자친구의 말을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 남자친구는 힘든 회사 생활로 인해 퇴사를 고민하고 있어, 금전적으로 저축이 많이 필요했고 ,
그 간의 경험치로 미루어보아, 족발 자체로도 충분히 양이 많아 막국수를 먹고 싶다는 나의 말은 그냥 장난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다 못먹잖아"라는 말과 함께 막국수를 다시 시키려 하지 않는 남자친구를 보니 서러움이 밀려왔다.
아무 대꾸도 안하고 입만 삐죽 내밀고 있으니 남자친구는
"보통 그렇게까지 많이 시키면 남기니까 안 시킨거지...다른거라도 사줄까?"라고 얘기한다.
그에 나는,
"막국수가 먹고 싶었던 것도 있었지만, 막국수를 먹고 싶어하는 나에게, 막국수를 사먹자고 말하는 너가 필요했어"라고 얘기했다.(말하고 나서도 내 자신이 한심했던건 안비밀)
그리고 그 다음 회심의 한마디로 철딱서니는 0에 수렴하는데...
"우리가 음식을 남기지 않는게 내가 막국수를 먹고 싶어하는 것보다 중요해?흑"
(하....이게 무슨 말이냐 도대체...)
말하고 나서도 참 어리숙하다고 느껴지지만 "그날의 나"는 그냥 이해하기로 했다...하하;;
잠깐 내 맘속의 어린아이가 튀어 나왔을 뿐이라고 말이다.어른의 탈을 쓰고 하루종일 괜찮은척 하며 살았는데 드디어 마구마구 투정만 부리고 싶은 내 안의 어린애가 튀어 나온 것이다.
보듬어 줬으면 했다.
어릴 때 먹고 싶은것은 기본적으로 한 번은 참아야 했던 시간의 나를,
운동화는 무조건 닳을 때까지 신고,
나 하나 배불릴 돈이 없어 나눌 줄은 잘 몰랐던 어린 시절의 나를,
친구들 도시락보다 부족한 도시락을 보면서, "이것만 사왔냐"는 친구의 말에 엄마가 야속하기도,
도시락을 바꿔먹자고 한 것도 아닌데 왜 지적하냐는 생각에 친구가 밉기도 했던 시간속의 나에게 말이다.
이젠 괜찮아, 먹고 싶은거 다 먹어.이젠 잘 될 일만 남았어.라고 해주길 바랬 던 것 같다.
물론, 바로 남자친구에게 사과는 했다. 남자친구도 왜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마음을 몰라줬다며 사과를 한다.(안 그래도 돼...)
그 와중에 지하철역 근처로 노숙자들이 지나가는데, 만족을 모르고 투정만 부리는 내가 한심하기도 하고 남자친구에게 고맙기도 하고 울컥한 마음이 밀려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모든게 상대적인 것임을, 모두가 이래저래 상처받고 있는 것임을 아직도 모르는 나에게 화가 난 걸수도 있을 것 같다.다만 이제는 중심을 잡고 다시 열심히 살아가야겠다.
가난했던 기억을 마음속 한군데에 품고 살며 종종 이유없이 상처받는 모든 분들께
이 글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말씀 드리고 싶다.
가끔 어린아이가 되어도 좋으니, 우리 다시 굳세게 훌훌 털고 일어나서 살아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