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역사가 숨 쉬는 도시, Philadelphia

by 윤기환


뉴욕의 불빛을 뒤로하고 우리는 남쪽을 향해 달렸다. 목적지는 필라델피아. 밤은 깊어가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 싶었다. 아이들이 쿠폰 북을 뒤적이며 숙소를 찾았고, Trenton의 한 모텔에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늦은 밤, 우리를 맞이한 것은‘빈방 없음’이라는 짧은 말이었다.

소개받아 찾아간 호텔은 번듯했지만, 하룻밤 200달러가 넘는 가격 앞에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돌아 나오던 길, 불 꺼지지 않은 대형 식품점 불빛이 우리를 붙잡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사서 차 안에 앉았다. 허기를 달래며 오늘 밤을 어디서 보낼지 상의했다.

선택은 단순했다. 이곳에서 밤을 보내기로 하고 주차장 한 켠에 차를 세웠다. 좁은 차 안을 잠자리로 삼았지만, 아이들은 이미 깊은 잠에 빠지고, 아내 역시 피곤함에 몸을 맡긴다. 그러나 나는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텅 빈 주차장, 낯선 도시의 밤,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밀려오는 불안이 엄습한다. 잠이 들려는 순간, 요란한 기계 소리가 어둠을 깨뜨린다. 청소차가 주차장을 쓸고 있다. 뒤척이다가 새벽 2시가 넘어 겨우 눈을 붙였다.

짧은 잠 끝에 눈을 뜨니, 어느새 아침 6시. 밤의 흔적은 사라지고, 새로운 하루가 밝아 있다. 전날 아낀 숙박비를 떠올리며 우리는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아침을 준비했다. 빵과 음료로 간단히 허기를 채우고 다시 길을 나섰다.


아침 9시, 우리는 마침내 Philadelphia에 도착했다.

17세기 후반, 종교적 자유를 꿈꾸던 퀘이커교도 William Penn이 계획적으로 설계한 도시. 격자형 도로와 넓은 공원, 그리고 ‘형제애의 도시’라는 이름처럼 공존과 자유를 지향했던 공간이었다. 그 이상은 훗날 한 나라의 탄생을 품는 그릇이 되었다. 도시의 심장부에는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Independence Hall, Carpenters' Hall, 그리고 Liberty Bell. 이곳에서 George Washington, Benjamin Franklin, Thomas Jefferson, John Hancock 등 건국의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새로운 나라의 길을 논했다.

우리는 먼저 방문자 센터에 들렀다. 무료로 개방된 전시관에는 미국 독립의 과정이 차분히 펼쳐져 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역사. 그것은 이 도시가 가진 또 하나의 철학처럼 느껴진다.


Independence Hall, 자유의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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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ependence Hall의 자유의 종


이어 찾은 자유의 종. 금이 간 채 전시되어있는 그 종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분열과 통합, 자유와 갈등의 시간을 함께 견뎌낸 상징이었다. 영국에서 만들어져 들여왔다는 ‘자유의 종’은,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찢어졌던 국가를 규합하기 위하여 전국을 순회했다 한다. 그 당시 기록사진에 의하면, 트럭 뒤편에 이 종을 싣고 다니면서 하나의 국가를 만들기 위하여 남과 북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였는데, 그때마다 수많은 군중들이 이 종을 보려고 몰려들면서, 이 종은 평화의 상징으로 세계인에게 각인 되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한쪽 끝에 금이 가 있는 자유의 종은, 완전하지 않은 인간의 역사, 아직도 진행 중인 평화의 이야기를 말해주는 듯하다.

Independence Hall에 들어서자, 시간은 18세기로 되돌아간다. 회의장 안의 공기는 묘하게 무거웠고, 그곳에 앉았던 이들의 고민과 결단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가이드는 마치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처럼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진지함 속에서, 이 나라를 만든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Benjamin Franklin과 Betsy Ross


길 건너편에는 Benjamin Franklin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13살 때쯤 보스턴에서 형이 운영하는 인쇄소를 돕기 위해 이곳 필라델피아에 온 밴자민 프랭클린은, 그의 특유의 친화력과 사업수완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 이후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독서클럽을 만들면서 그들과 함께 현실정치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의회에 진출하게 되면서 정치가로서의 명망을 얻는다. 문학가이기도 했던 그는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게 되고, 미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중년 이후에는 과학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연을 이용하여 피뢰침을 발명하고, 유리그릇을 이용한 악기를 만들어 내는가 하면, 열기구의 열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을 고안해 내는 등 과학자로서도 대성공을 거두는 천재였다. 인쇄업자로 시작해 정치가, 과학자, 사상가로 이어진 그의 삶은 한 도시의 역사를 넘어 한 시대를 상징하고 있었다. 그의 집터 옆에는 그가 운영하던 인쇄소가 지금도 옛날의 모습으로 남아 있고, 그 당시의 인쇄 방법을 직접 시연하고 있다. 인쇄소에서 그 당시 방법으로 인쇄를 한 ‘독립선언서’를 3달러 주고 한 장 샀다. 종이 한 장이지만, 그 안에는 한 나라의 시작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다시 길을 걸어 Betsy Ross House로 향했다. 13개의 별로 이루어진 첫 번째 성조기. 소박한 집과 작은 정원은 거창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나라의 시작을 만든 손길이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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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jamin Franklin 인쇄소와 Betsy Ross의 국기


Philly cheesesteak


걷다 보니 허기가 밀려왔다. 마침 눈에 들어온 것은 필라델피아의 명물, Philly cheesesteak. 따뜻한 빵 사이에 녹아든 치즈와 고기의 풍미는 생각보다 깊다. 치즈를 즐기지 않는 나조차도 그 맛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지에서의 한 끼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그 도시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아이들의 성화에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렀다. 뜻밖에도 주인은 한국인이었다. 낯선 도시에서 들려온 “안녕하세요” 한마디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짧은 대화 속에서 서로의 삶이 스쳐 지나갔다. 여행자는 떠나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 남아 삶을 이어간다.

마지막으로 들른 Washington Square. 나무 그늘 아래 앉아 하루를 돌아보니, 이 도시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한 나라의 시작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이야기가 숨쉬고 있었다.


다시 이어갈 길을 생각한다.

다음 목적지를 향해, 또 다른 이야기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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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ly cheesesteak와 Washington Squ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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