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편지를 읽는 저녁

황영선

by 황영선

옛 편지를 읽는 저녁

영선





비 내리는 분황사 뜰에

막 핀 배롱나무 꽃송이들이

제 몸의 꽃빛을 풀어

시를 쓰고 있었지

받아 적기도 전에 지워지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본 일 말고는

이 저녁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지만

가슴에 물기처럼 번지는 그것이 시가 아니었을까?


귀 열고 문 열어 두어도

나는 아직 캄캄한데

한 몸인 듯 편안해진 모습으로

어둠과 빛의 경계를 허물고 있던 풍경소리


백 년도 못 견딜 한 생애

쓸쓸한 저녁이 찾아오면

흐린 불빛에 기대어 시를 읽다 잠이 들겠네

못다 읽은 시편들은 가슴으로 읽으리







1997년《시문학》등단.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

눈높이 아동문학상 동시. 평사리 문학대상 수필 당선.

2023년 아르코문학창작 발표지원 선정

경주문협 회원. 경주펜 회원, 경주문맥 동인. 행단묺학 동인

시집『우화의 시간』, 『이슬도 풀잎에 세들어 산다』

동시집『웃음빵』, 수필집 『배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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