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必告 反必面 (출필고 반필면), 사랑은 인사를 타고

by 진향림 최윤순

제목 : 出必告 反必面 (출필고 반필면), 사랑은 인사를 타고 온다


12월 어느 늦은 저녁, 큰딸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상의할 게 있어요.” 거친 숨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말을 잇지 못하고 몇 번이나 숨을 고르는 소리였다. “아버님이요…. 허리 아파서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을 봐줄 수 없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동안 큰딸 삼 남매를 살뜰히 돌봐주던 바깥사돈이 아프다니, 예기치 못한 일이 학기 중에 터진 것이다.


나는 숨죽이며 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엄마… 저희 아이들 등원만 시켜주시면 안 될까요?”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딸의 걱정과 미안함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사실 나는 작은딸 남매를 매일 돌보고 있지만, 사위가 손주들을 등원시키고 출근해 하원만 맡고 있다. 시간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결국 내가 나서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일이 가중되니 내 몸 컨디션이 걱정돼,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으니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큰딸이 살고 있다. 조금 있으면 교사인 딸도 방학하니, 그때까지만 봐주면 또 한숨 돌릴 수 있을 것이다.



6학년, 3학년인 두 손자는 알람이 울리면 자기들이 척척 알아서 학교에 간다. 여섯 살 손녀만 어린이집 등원시켜 주면 되는 상황이었다. 첫날, 칼바람을 맞으며 손주네로 출근했다. 아이들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멍하니 식탁에 앉아 있다. 몇 마디 나누다가 딸은 급히 출근하고, 방울토마토와 찐 달걀을 꾸역꾸역 먹는 손주들!

얼마 후 큰 손자가 인사한다. “할머니 학교에 다녀올게요.” 그때 문득 생각났다. “성규는 어디 있어? 학교 가야 할 텐데.” 화장실이며 옷 방이며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시간이 되고 알람이 울리니 벌써 뛰쳐나간 거였다. ‘그래 할머니한테 인사도 없이 학교에 갔구나! 그러면 안 되지. 나갈 때는 꼭 인사하고 가야 한다고 알려줘야지.’ 마음먹었다.



다음 날, “성은아, 이면지 한 장 가져와.” 종이에 한자로 ‘出必告 反必面’이라고 썼다. “얘들아, 이리 와봐. 할머니가 퀴즈를 낼 거야.” 답지 부분은 접어놓고 한자로 쓴 글자를 보여줬다. 물론 아이들은 읽지 못했다.

‘출필고 반필면’이야 한글로 읽어주었다. “뜻은 인터넷으로 찾아와도 돼. 서로 들리지 않게. 할머니 귀에만 속삭여 줘.” 큰 손자는 자기 핸드폰으로 찾고, 둘째 손자는 인터넷이 안 된다고 해서 내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이 한자의 뜻을 찾아오면 할머니가 상품을 줄 거야. 퀴즈 답안 선택지가 네 가지야.” 아이들은 금세 호기심이 생겨 부지런히 찾아서 내 귀에 바짝 대고 비밀스럽게 말한다.

“맞아.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님들은 집에서 나갈 때는 부모에게 나간다고 말하고, 돌아와서는 잘 다녀왔다고 인사했단다.” “부모가 아니어도 돼. 할머니 할아버지여도 되고, 반려동물이라도 괜찮아. 이제부터 나갈 때는 꼭 인사하고 가는 거야. 알았지! 퀴즈 답지 번호를 골라 봐.” 큰손자는 1번, 작은손자는 4번, 막내는 2번을 골랐다. 두 손자가 영어학원에 다녀서 처음엔 답지도 영어로만 썼다.



“짜라란, 지금부터 답지를 펼치겠다. 집중!” 1번 답지를 큰손자한테만 살짝 보여주었다. 아이는 반가운 얼굴로 얼른 뛰어와 할머니를 격하게 안아 준다. “자, 둘째야 너는 4번이지?” 4번답지도 은밀하게 보여줬다. “입에 뽀뽀하기”였다. 나는 좀 미안하고 긴장했다.

‘에이, 나 안 할 거야. 어떻게 할머니한테 뽀뽀해요.’라고 말하면 어떡하지. 혼자 상상했는데…. 둘째 손자의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이 쏜살같이 내 입술에 닿았다. 아무 거리낌 없이 뽀뽀하는 것 아닌가?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라, 나는 둘째를 한동안 바라봤다. 아이는 태연했고 당황한 쪽은 오히려 나였다.

“할머니, 나는 상품이 간식인 줄 알았잖아!” “야, 너희 간식이 저 창고에 수북하고 식탁에도 많잖아. 할머니가 뭘 간식을 선물로 걸겠니? 너희 할머니는 그런 사람 아니야.” 나머지 하나 3번 답지는 “볼에 뽀뽀하기”였다. 손주들은 할머니가 만든 종이를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출필고 반필면’을 여러 번 따라 읽었다.


둘째가 의심스러운 듯 묻는다. “할머니, 그런데 집에 돌아왔는데 엄마가 없으면요?

아무도 없으면 어떻게 말해요?” “집에 말해봐. 집아, 나 학교에 잘 다녀왔어. 너도 잘 있었지?”

그다음 날 아침, 둘째가 말했다.

“할머니 나 어제 집에 잘 다녀왔다고 말했어요.”

“하하, 잘했어. 기분이 어땠어?”

“그냥 뭐, 좀 웃겼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웃음이 먼저 흘러나왔고, 이런 생각을 하는 아이가 귀엽고 기특했다.



그 뒤로 둘째 손자는 학교 갈 때 잊지 않고 나를 꼭 안아 주고 간다. 벌써 커다란 품이 느껴질 만큼 훌쩍 자라버린 손자를 안는 일이 요즘 나의 기쁨이고 기다림이다. 애들이 잊지 않고 그 루틴을 계속해 줘서 참 고맙다. 손주들한테 사랑을 듬뿍 주는 것도 좋지만, 사랑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도 꽤 신나는 일이다.

“얘들아, 이젠 너희 셋이 엄마를 도와줘야 할 때야.

옷장 문도 닫고, 방바닥에 널브러진 옷도 세탁실에 놓고 가면 좋겠어. 이불 정리는 혼자 할 수 있지?”

큰 손자는 나를 안으며 말한다. “할머니, 이불 정리했어요. 저 학교 가요.”

그러나 간간이 잊어버릴 때도 있다. “오늘은 할머니가 이불 정리해 줄게. 여기, 신발주머니 안 챙겼다.”

“어휴, 할머니 감사합니다. 잊을 뻔했어요.” 서로 챙겨주고 고맙다고 말하니 입꼬리가 자주 올라간다.



3년 전에도 삼 남매를 돌봤지만, 그때는 아이들이 어려서 잔소리가 심했고 눈에 띄는 성과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나이 들고 커가니 적어도 할머니 앞에서는 잘하려고 노력한다.

어른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고 실천하려는 모습도 듬직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매일 반복되는 작은 인사와 태도가 쌓여 조금씩 커간다. 어렸을 때 몸에 밴 태도가 평생 간다고 하지 않던가. 사랑은 많이 주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고, 그 자리를 꾸준히 지켜주며 기다려 주는 것.


끊임없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봐 주는 일은 결국 어른의 몫이다.

월요일 아침 딸 집에 들어선 순간, 여섯 살 손녀가 “출필고 반필면!” 큰 소리로 외치며 달려든다. 아이가 품에 안기기도 전에 웃음이 먼저 터졌다. 이렇게 손주들과 함께했던 작은 놀이가 시나브로 스며들고 있는 듯해, 그 아침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래된 말 하나가 또 하루를 활기차게 열어 준다. 이렇게 사랑은, 서로의 작은 행동 속에서 커간다.

(좋은 생각 제21회 생활 문예 대상 공모전에서 입선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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