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늘 상징을 통해 신과 대화하려 하는가
타로를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이 ‘무엇을 알고자 했는가’보다, ‘어떻게 알고자 했는가’를 봐야 한다.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지식의 기원은 언제나 신과의 대화였다. 농사를 지을 때 하늘을 읽고, 아이를 낳을 때 별의 위치를 보며, 전쟁을 앞두고 제사를 올렸다. 인간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신호를 읽어내려 했다. 그리고 그 신호를 해석하는 사람, 곧 샤먼(shaman) 이 있었다.
샤먼은 세상과 신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들은 신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고, 혼돈을 질서로 바꾼다. 점, 기도, 춤, 노래, 상징적 도구들 — 이 모든 것은 결국 ‘보이지 않는 질서’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시도였다. 그 긴 역사적 맥락에서 타로는 결코 외딴 현상이 아니다. 타로는 유럽 문명의 한복판에서 태어났지만, 그 뿌리는 훨씬 더 깊고 오래된 인간의 본능, 곧 상징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려는 샤머니즘적 욕구에 닿아 있다.
타로 카드의 기원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의 비밀 교단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학자들은 15세기 이탈리아의 귀족 놀이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형태가 어떠하든, 타로는 단순한 카드게임 이상의 의미를 품었다. 78장의 그림은 각각 인간의 삶, 죽음, 사랑, 불안, 선택을 상징하며, 카드 배열은 일종의 ‘의식’으로 작동했다. 사람들은 카드를 통해 우주의 흐름을 읽고, 자신의 운명을 해석했다. 이때 ‘카드 리더’는 단순한 점술가가 아니라, 상징의 해석자, 다시 말해 현대적 샤먼이었다.
샤머니즘과 타로의 가장 본질적인 공통점은 ‘상징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샤먼은 북소리와 춤을 통해 영적 세계와 접속하고, 타로 리더는 카드의 상징을 통해 무의식의 흐름을 읽는다. 두 행위 모두 인간의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을 상징으로 번역한다. 이 상징은 정확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오히려 해석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죽음의 카드가 반드시 ‘끝’을 의미하지 않듯, 샤먼의 북소리가 반드시 ‘소리’로만 기능하지 않듯, 그것은 경계의 언어, 즉 인간과 신,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틈’을 연결하는 언어이다.
이 ‘틈’을 다루는 능력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지식의 형태였다. 농경 이전의 인류는 자연의 신호를 읽는 존재였다. 바람의 방향, 짐승의 울음, 별의 움직임. 인간은 그것들을 단순한 자연현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 안에서 의지를 읽고, 의미를 부여했다. 타로 또한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현대인은 카드를 통해 ‘우주의 의지’를 읽으려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자기 마음의 투사다. 그러나 그 ‘자기 마음’조차 우주와 닿아 있다고 믿는 순간, 인간은 다시 전체와 연결된 존재로 느낀다. 샤머니즘의 본질이 바로 그 연결감에 있다.
샤머니즘은 언제나 공동체적 행위였다. 개인의 병을 고치고, 마을의 운명을 점치며, 조상과 소통하는 의식이었다. 타로 또한 외형적으로는 개인의 상담 같지만, 그 안에는 공동체적 서사가 숨어 있다. 사랑, 이별, 진로, 인간관계 — 타로가 다루는 주제는 결국 ‘나와 타인’의 관계다. 타로 상담사는 개인의 질문을 통해 사회적 구조를 읽는다. 이때 리더는 단지 개인을 위로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의 감정을 통역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현대의 타로 리더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형태의 샤먼이라 할 수 있다.
샤먼은 언제나 이야기꾼이었다. 신화와 노래로 세계를 설명했다. 타로 역시 서사적 구조를 지닌다. 한 장 한 장의 카드는 서사의 한 장면이고, 그것들을 배열하는 행위는 곧 이야기를 짜는 행위다. ‘바보(The Fool)’에서 시작해 ‘세계(The World)’로 끝나는 메이저 아르카나는 인간의 성장과 귀환의 여정을 상징한다. 이 구조는 수많은 신화에서 반복되는 ‘영웅의 여정’과 닮았다. 즉, 타로는 신화의 현대적 축소판이며, 타로 리딩은 신화적 이야기를 개인의 인생에 다시 불러오는 의식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타로는 단순한 예언술이 아니라 상징적 서사 행위다. 샤먼이 트랜스 상태에서 영혼의 세계를 여행하듯, 타로 리더는 상징의 세계를 여행한다. 그 여행의 목적은 미래의 예측이 아니라 의미의 회복이다. 상징의 세계를 통해 내담자는 자신의 삶을 다른 관점에서 본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질문이 “이 경험이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로 바뀌는 순간, 인간은 고통을 견딜 수 있다. 샤머니즘이 본질적으로 ‘치유의 의례’였듯이, 타로 또한 심리적 치유의 의례이다.
흥미롭게도, 타로는 중세의 기독교 사회에서 오랫동안 이단적인 도구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 박해 속에서도 타로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금지와 금기가 타로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서 신성을 느끼고, 통제할 수 없는 것에서 믿음을 찾는다. 샤머니즘이 이성과 종교의 경계에서 살아남았던 이유도 그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합리로는 닿을 수 없는 영역’을 필요로 했다. 타로는 바로 그 욕망의 현대적 변주다.
현대 사회는 합리성과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둔다. 그러나 합리성만으로는 인간의 불안을 다루기 어렵다. 불안은 계산되지 않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의식’을 찾는다. 명상, 요가, 타로, 아로마, 별자리 — 이 모든 것은 각기 다른 옷을 입었을 뿐, 샤머니즘의 현대적 형태들이다. 모두 인간이 자신과 세계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시도다. 타로는 그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이다. 손에 잡히는 이미지, 즉각적인 해석, 그리고 개인의 이야기. 이 세 요소가 결합하면서 타로는 고대의 제의가 현대의 상담으로 변모했다.
타로 리더가 카드를 펼치는 순간, 그 행위 자체가 하나의 의식이다. 공간이 조용해지고, 카드가 섞이는 소리가 흐르고, 누군가는 질문을 던진다. “지금 나는 어떤 길 위에 있을까요?” 이 질문은 샤머니즘의 기원과 같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길’을 알고자 했다. 그 길이 물리적 여정이든, 정신적 성장의 여정이든 상관없다. 타로는 그 길을 ‘보여주는’ 도구가 아니라, 그 길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도구다. 이 점에서 타로는 과학이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과학이 사실을 다룬다면, 타로는 의미를 다룬다.
따라서 타로는 단순한 점술의 유행이 아니라, 인간의 의례적 본능이 현대의 언어로 다시 표현된 형태다. 샤머니즘이 원시적이라면, 타로는 상징적이다. 그러나 둘 다 결국 같은 목적을 향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소통, 더 나아가 자기 내면의 신성한 영역과의 만남이다. 인간은 여전히 신을 찾지만, 이제 그 신은 카드 속에, 상징 속에, 이야기 속에 숨어 있다. 타로는 그 신과 다시 대화하게 만드는 매개다.
결국 타로의 역사는 인간의 내면이 세계와 연결되기를 바라는 긴 여정의 또 다른 이름이다. 샤먼이 북소리로 영혼을 불렀듯, 타로 리더는 카드를 통해 상징을 불러낸다. 그 행위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해석하고, 세계의 일부로 다시 자리 잡는다. 불확실한 시대에도 이 오래된 언어가 계속 살아남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인간은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상징을 통해 신과 자신을 이해하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