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관계

by 윤재

59. 아름다운 관계


이 공간에 글을 올리다 보니 100번째가 되었습니다.


이문재 시인은 ‘ 파가 자라는 이유는 속을 비우기 위해서다’라고 했는데,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아니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글을 쓰고 싶은 이유는 기억하기 위해서이니 시인의 ‘비움’과는 조금 다릅니다. 오히려 기억하려는 욕망에 더 가깝습니다.


나이가 들며,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게 되면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저 자신을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문장 하나, 장면 하나에 잠깐 머무를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를 되짚어보거나 되새길 수 없다는 걸 자주 실감하곤 합니다. 기록되지 않은 감각은 금세 휘발되고, 떠오르지도, 돌아오지도 않습니다. 익숙했던 ‘기억’이 자꾸 손에서 미끄러져 나갑니다.


이 낯설고 당황스러운 변화는 때로 불안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인지의 어떤 능력이 점점 흐려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한편으론, 너무 과장된 우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 두려움은 쉽게 잠재워지지 않습니다.

‘글쓰기’라는 행위는 더 이상 나에게 순수한 갈증이나 열망의 결과가 아닙니다. 문장이 나를 향해 먼저 손을 뻗어오는 일도, 문장 하나가 가슴을 울려주는 일도, 이제는 점점 드물어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점점 사라지니, 손끝도 무뎌지고 자판도 조용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단어를 불러내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다시 나로 기억하게 해주는, 어쩌면 마지막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을 포착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 알아차리기 위해,

징검다리 건너듯 여기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00번째가 됩니다.


’ 백‘은 어쩌면 횟수라기보다 시간의 밀도에 가깝습니다.

삶의 흐름 속에서 무언가가 백이라는 숫자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거기에 무게와 의미를 부여하곤 하지요. 백은 단순한 누적이 아니라, 지속을 선택한 의지의 증표라 볼 수 있습니다


기념한다는 것은 단순히 ‘셈’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은 지나온 시간을 한 번 더 되새기고, 그 시간들이 만들어낸 자신을 조용히 마주 보는 일이 됩니다.


‘100’이라는 숫자는 하나의 원을 이루는 완결성의 상징이자, 단위를 넘어서기 위한 첫 계단입니다. 1에서 99까지는 아직 미완의 흐름이며, 백은 비로소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상징적 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백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백일을 넘긴 사랑은 이제 진짜 관계의 시작이고, 백일을 넘긴 생명은 진짜 삶의 첫걸음을 딛는 ‘아름다운 관계’의 시작일 것입니다. 아름다운 관계를 생각하니 박남준 시인의 시가 생각납니다.



<아름다운 관계>


박남준


바위 위에 소나무가 저렇게 싱싱하다니

사람들은 모르지 처음엔 이끼들도 살 수 없었어

아무것도 키울 수 없던 불모의 바위였지

작은 풀씨들이 날아와 싹을 틔웠지만

이내 말라버리고 말았어

돌도 늙어야 품 안이 너른 법

오랜 날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지

그래 아름다운 일이란 때로 늙어갈 수 있기 때문이야

흐르고 흘렀던가

바람에 솔씨 하나 날아와 안겼지

이끼들과 마른 풀들의 틈으로

그 작은 것이 뿌리를 내리다니

비가 오면 바위는 조금이라도 더 빗물을 받으려

굳은 몸을 안타깝게 이리저리 틀었지

사랑이었지 가득 찬 마음으로 일어나는 사랑

그리하여 소나무는 자라서 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바람을 타고 굽이치는 강물 소리 흐르게 하고

새들을 불러 모아 노랫소리 들려주고

뒤돌아본다

산다는 일이 그런 것이라면

삶의 어느 굽이에 나, 풀꽃 한 포기를 위해

몸의 한편 내어준 적 있었는가 피워본 적 있었던가


--박남준, <당신에게 시가 있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류근, 진혜원 엮음, 2021 중에서



‘은둔의 시인’ ‘자연의 시인’, ‘지리산의 시인’이라 칭해지는 박남준(1957~ ) 시인은 노래도 잘하고, 시화에도 능한데 그는 “나누면서 살면 행복해진다”라고 합니다. 소설가 한창훈은 시인을 일러 “사람들이 흔히 칭하기를 풀잎 같고 이슬 같고 바람 같고 수선화 같고 처마 끝 빗물 같고 나비 같고 어린 왕자 같고 눈물방울 같은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 그러니까 오십 넘도록 홀로 스님처럼 지내며 시와 음악과 새소리, 매화를 동거인으로 두고 살고 있습니다. 삶은 정갈하고 성품은 깨끗하고 몸은 아담하고 버릇은 단순하고 행동거지는 품위 있고 눈매는 깊고 손속은 성실한 데다가 시서에 능하고 음주는 탁월하고 가무는 빛나는 가인(佳人) 입죠.”(‘박남준 시인 말입니까’ 중에서)라고 전합니다.


시인은 “밥을 해서 된장국에 말아먹고 난 다음에 샘물을 길어 와 차를 끓여 마시고, 음악을 듣는 것이다. 이때가 가장 행복하다.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죄책감 비슷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라고도 합니다. (출처: 행복이 가득한 집 중에서) 자연의 품 안에서 그 누구보다 풍요로운 삶,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 시인은 한 달 생활비 30만 원이면 족하다고 하는군요.


그런 시인이 “바위 위에 소나무가 저렇게 싱싱하고, 아름다운 일이란 때로 늙어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늙어가는 과정에 있는 저에게 매우 위로가 되는 글입니다. 바위는 생명이 자라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대상이지만 그도 시간이 지나야 품 안이 너르게 된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소나무는 단지 자란 것이 아니라 기적처럼 자란 존재로- 절대 자랄 수 없을 것 같은 조건 속에서도,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아주 느리게, 그러나 꾸준히 자리 잡은 생명의 징표가 됩니다. 굳은 몸에 스며든 물, 마르고 다시 젖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도 떠나지 않은 마음, 시간을 견디는 사랑이 필요한 것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도 한순간에 피어나지 않습니다. 바위 위의 소나무처럼, 살아가는 일도 사랑하는 일도 기다림과 인내, 스며듦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이 시가 품은 삶의 태도는 ’ 백 百‘이라는 숫자의 의미와 깊게 맞닿아 있습니다.

백일, 백 번, 백 개의 걸음.

백은 단순한 셈이 아니라, 스스로를 바위처럼 내어준 시간의 층위이며, 마침내 푸른 그늘을 드리우는 결과입니다.


"산다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삶의 어느 굽이에 나, 풀꽃 한 포기를 위해

몸의 한편 내어준 적 있었는가 피워본 적 있었던가 “

이 마지막 문장의 힘은 강렬합니다.

이 시는 묻고 있습니다.

삶이란 결국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어주는 일, 바위처럼 단단한 자리에서조차 한 번 더 품는 마음, 그리고 결국엔 그 마음이 자라게 만든 푸르름이 아니냐고....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는 자리에도 누군가를 위한 그늘이 되고, 마음이 머물 수 있는 푸른 생명 하나를 틔워낼 수 있었는지—시는 우리에게 삶의 본질적인 질문을 건네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작지만 확실한 쉼이 되어줄 수 있었던가. 그저 ‘자리를 지킨’ 것이 아니라, 시간을 겹겹이 쌓아온 끝에 그늘이 된 존재로 살아왔는지를 되묻는 것입니다.


“비가 오면 바위는 조금이라도 더 빗물을 받으려 굳은 몸을 안타깝게 이리저리 틀었지”라는 이 구절 앞에서 나의 마음과 몸을 돌아보게 됩니다. 단단함이 때로 미안함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순간 단단한 척하며 살아왔을까.

박남준 시인의 시 <아름다운 관계>는 단지 누군가와 누군가 사이의 관계라기보다 더 깊고 오래된 관계, 내 마음과 몸 사이의 묵은 거리, 혹은 나와 자연 사이의 침묵 속의 교감을 조용히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크고 빛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끼와 마른풀, 말라가는 웅덩이, 작은 뿌리, 늙어가는 돌 안에 숨어 있습니다.



박남준 시인의 시에는 결핍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른 바위조차 사랑의 자리로 바뀝니다. 이러한 시선은 곧 검소함의 미학입니다. 그는 자연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의 질서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 있는 나의 마음을 꺼내어 보게 됩니다.


검소한 존재, 마음을 위한 삶.

많이 자라기보다는 깊이 뿌리내리는 쪽을 선택했고,
빠르게 흐르기보다는 천천히 스며드는 방식을 택한 시인의 삶을 통해

아름다운 관계를 배우게 됩니다.

타자와의 관계 이전에,
나와 나 자신 사이의 화해,
마음과 몸 사이의 따뜻한 인사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시 속에서 몸과 마음의 거리, 존재와 자연의 거리를 좁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날 조용히 흐르는 물소리, 마른 잎 사이로 피어난 이끼 하나, 나무 그늘 아래 쉬는 바람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그 소소한 순간 속에서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음은 더 이상 외롭지 않고, 몸은 더 이상 무겁지 않게 됩니다.



시가 말하는 아름다운 관계는, 그런 삶의 결을 품은 태도이자, 묵묵히 쌓아 올린 나날들 위에 피어난 한 줄기 푸름입니다. 박남준 시인이 말한 “풀꽃 한 포기를 위해 내어 줄 수 있는 몸”의 자세는, 박대성 화백이 던진 붓끝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박대성 화백의 그림 '청산백운(靑山白雲)'!


거대한 한지 위에 번진 묵의 결, 푸르른 산과 하얀 구름이 어우러지는 그 장면은, 마치 오래도록 침묵하며 삶의 계절을 견뎌낸 자의 응시처럼 고요하고도 묵직합니다. 구름은 머물지 않지만 흔적을 남기고, 산은 침묵하지만 모든 시간을 품고 있습니다. 화폭에 담긴 ‘백운(白雲)’은 그 자체로 삶을 되묻는 질문처럼 피어나고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품은 산, 그리고 그 산을 감싸 안는 흰 구름. 그것은 누군가의 삶에 깃든 온기이자, 스스로를 내어주며 완성된 ‘관계’의 형상처럼 보입니다. 단단하고 절제된 선들 속에서조차, 마음을 머무르게 하는 여백이 있고, 그 여백은 곧 푸른 산과 흰 구름처럼, 기억과 위안의 형상으로 존재합니다.


소산(小山) 박대성(1945~ ) 화백은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1969년부터 국전에서 내리 8번을 입선하며 실력을 인정받은 ‘한국 산수화의 거장’입니다. 그는 고난이 키워낸 집념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전했습니다. “혼자 공부할 때는 외롭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제도권 교육을 받았다면 지금처럼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박대성 화백은 겸재 정선의 대를 잇는 작가로 평가되며 한국화의 실경산수를 그 자신의 독보적인 화풍으로 발전시켰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박대성 화백은 몇 달씩 전시가 연장되는 놀라운 경험을 한 해외 순회전에 대해 "일평생 ‘보이지 않는 뿌리’를 찾았기 때문에 관객들이 그 진정성을 느낀 것"이라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무수한 붓질로 길러온 그의 필력은 그림을 지탱하는 뿌리이자 무한한 가능성으로 뻗어 나갈 힘의 원천으로, ”수묵의 핵심은 선으로 득음(得音)을 하듯 득필을 해야 선이 살아 움직인다 “고 하는 화백의 작품 <청산백운, 2013>에서는 역동적인 필력으로 담대하게 먹을 사용하여 현대적인 느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화의 쇠퇴는 일제강점기 등 역사적 요인도 있지만 공부를 하지 않고, 정신을 강조하는 고유한 우리 문화가 물질이 강조되는 서구문화에 매몰됐기 때문”이라며 “자연을 스승이자 교육장으로 삼아 불철주야로 공부하며 살아가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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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성, <청산백운>, 2013, 작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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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성, <청산백운>, 2022, 솔거미술관



두 그림은 같은 제목을 공유하면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된 작가의 미감과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2013년의 그림에서 자연과의 ‘거리 두기’의 관조적 시선이 엿보인다면, 2022년의 그림에서는 산과 구름이 추상화에 가까울 정도로 단순화되고, 붓의 움직임이 더 직접적으로 감정과 혼을 담은 것으로 자연 자체와 융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013년의 그림이 ‘푸른 산에 흰 구름이 떠 있는 것’을 보여준다면, 2022년의 그림은 "내가 곧 그 구름이고, 그 산이다"라는 울림으로 이어집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붓은 더욱 가볍고 자유로워졌습니다.



청산엔 백운이 감기고
구름은 무심한 듯 흘러가네
그림은 멈춰 있지만
삶은 그 속에서 여전히 흐른다



한국전쟁 당시 왼팔을 잃은 박대성 화백의 상처는 좌절과 낙담 대신, 존재의 이유를 묻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한 손으로 붓을 들고, 그 손으로 생을 안았습니다. 그가 마주한 바위, 바람, 산, 구름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비추는 경전(經典)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가톨릭 신자이지만 그의 그림은 종교의 벽을 넘고 있습니다.

그의 그림은 선禪과 닮아 있습니다.
“비워야 보인다”는 불교적 사유,
“있는 그대로가 진리”라는 동양의 직관이 담겨 있습니다.

구름은 산을 덮고, 산은 구름을 품고 있습니다.
이는 곧 신이 인간을 감싸듯, 상처가 삶을 안듯,
모든 존재는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청산백운>은 단지 풍경을 담은 그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기도이며, 묵언의 찬송입니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산세는 세상에 뿌리내린 믿음을 말하고,
허공에 부유하는 백운은 모든 존재가 머무는 곳 없이 흐른다는 진리의 은유로 보입니다.


박대성 화백의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면,
그 여백 속에서 ‘나’와 ‘타자’ 사이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산은 나고, 구름은 너이며,
그 사이 공백은 우리가 맺는 관계의 자리입니다.

아름다운 관계는 존재와 존재의 간격에서 이루어집니다.


푸른 산에 흰 구름이 머물며, 산의 굴곡과, 어둡고 밝은 먹의 조화가 자연의 순환과 생명의 리듬을 이미지로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청산백운〉은 맑음과 흰 구름의 대조, 고요와 역동 사이의 긴장이라는 이중적 긴 호흡을 담고 있습니다.


작가는 이 회화를 그리기 위해 오랜 시간 공부하고 자연을 직시했을 것이며, 그 사유의 결실이 바로 이 백운 속에 응결된 ‘백의 의미’입니다. 그림 앞에 섰을 때, 마음속에서 먼저 흐른 것은 말이 아닌 숨이었습니다. 박대성 화백의 〈청산백운〉은 거대한 산의 어깨 위에 아주 천천히, 그러나 또렷하게 내려앉은 한 점의 구름입니다. 검은 붓의 농담으로 채워진 산은 숨을 머금은 듯 고요하고, 그 위를 스쳐 가는 흰 구름은 아무 말 없이 시간을 건넵니다.


‘백운(白雲)’이라는 흰 구름은 단지 색이 아닙니다. 그것은 속됨을 벗어난 순수, 때 묻지 않은 마음, 비워내고도 남는 여운입니다. 하늘에서 가장 가벼운 존재이면서, 산 위에 내려앉는 순간 세상의 무게를 담아내는 것—그것이 백운이지요. 그런데 ‘백(白)’이라는 이 글자가, 동시에 숫자 ‘백(百)’과 음이 같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수 있을 것입니다. 수묵화는 번짐의 예술이지요. 먹이 번지는 만큼 여백이 살아나고, 비워낸 자리만큼 형상이 선명해집니다. 백 번의 붓질, 백 번의 멈춤, 백 번의 숨을 고른 끝에야 이 흰 구름은 비로소 산 위에 착지하겠지요.


<청산백운, 靑山白雲〉은 그래서 한 폭의 그림이 아니라, 백 번을 넘겨 도달한 하나의 고요입니다. 화가는 수없이 물을 묻히고, 먹을 조절하고, 농도를 다스리고, 수백 번의 연습 끝에 이 한 점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남겨진 ‘백운(白雲)’은 숫자의 백(百)처럼 축적된 시간이고, 흰 백(白)처럼 투명한 정수입니다. 화폭에 그려진 산은 검고 단단합니다. 세상의 무게를 감당해 온 바위와 흙의 결이 묵직합니다. 그러나 그 위에 떠 있는 구름은 가볍습니다. 스스로를 비워낸 존재만이 산 위에 안착할 수 있다고 전하는 것 같습니다. 무겁고 단단한 것과, 가볍고 투명한 것이 이 한 장 안에서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림을 오래 바라보고 있노라면, 흰구름(백운)은 백 번의 기다림이고, 백 번의 고요이며, 백 번 스스로를 다듬은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은 시간의 예술입니다. 숫자로서의 백(百)과 색으로서의 백(白)이 만나, 삶을 닦은 자만이 볼 수 있는 경지를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구름은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지나간 자리는 말보다 깊습니다. 〈청산백운〉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시간의 겹, 삶의 무게, 그리고 그 너머의 맑음을 보여줍니다.


박대성 화백의 삶은 “무엇을 그릴까”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그의 그림은 말이 없지만, 그의 삶은 그림을 통해
신에게 말 걸고,
자신을 껴안고,
세상을 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이 글은 나의 100번째 기록입니다. 숫자 ‘백’이 시간을 되새기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자리라면, 박남준 시인은 묻고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삶의 어떤 뒤꿈치쯤에 풀 한 포기 내어줄 수 있는 몸이었느냐고."
그 물음은 나에게 서늘하고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과연 그렇게 살아왔는가.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어주었는가.

기억 속에 따뜻한 여백 하나 남겨주었는가.


박대성 화백의 <청산백운>은 그 질문에 대한 또 다른 대답처럼 다가옵니다. 고요한 산과 하얀 구름의 조화는 말없이 말합니다. 시간을 견디는 것, 자리를 지키는 것,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를 비워 누군가에게 안식이 되는 것—그것이 곧 ‘아름다운 관계’라고.



살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집니다. 어떤 인연은 불꽃처럼 찬란하게 타오르다 사라지고, 어떤 관계는 오래도록 조용히 숨을 쉬듯 우리 곁에 머물지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 그 자체가 이미 인생의 깊은 수수께끼이며, 그 안에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비추고 이해하고 성장해 나갑니다.


아름다운 관계란 무엇일까요?

격렬한 사랑일까요, 조용한 우정일까요, 혹은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통했던 순간일까요?

인간은 거울 같은 존재라고 어떤 심리학자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눈동자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타인의 태도에서 자신의 상처를 읽기도 합니다.

어떤 철학자는 또 말합니다.

관계는 자기로부터 타자로 나아가는 용기라고. 진정한 관계는 ‘나’의 테두리를 넘어 ‘너’를 받아들이는 모험이라고요.


하지만 관계는 언제나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서로를 오해하고, 실망하고, 때로는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처를 주기 쉽고, 소중한 인연일수록 놓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이 관계는 나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나는 이 관계 안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가? “


아름다운 관계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때로 그것은 상처를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통해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는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침묵 속에서, 때로는 고백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다시 만납니다. 관계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무너지며, 다시 세워지는 유기체입니다.


"당신이 타인과 맺는 관계는 모두 당신 자신과의 관계를 반영한다."라고 구스타프 칼 융은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관계는 결국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나의 두려움, 나의 결핍, 나의 사랑의 방식까지 이해하고 나서야 타인을 진정으로 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 남는 것은 결국 관계입니다. 기억 속의 미소, 편지 한 장, 말없이 건넨 손길 하나가 시간이 지나도 여운처럼 남습니다. 관계는 기록되지 않는 예술입니다. 그것은 순간순간의 선택으로 만들어지는, 매번 새롭게 빚어지는 삶의 작품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관계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지향되는 상태입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 속에서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비로소 경험합니다.



결국, 아름다운 관계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있어서 내가 더 나다운 사람이 될 수 있었어요."
이보다 더 깊은 고백이, 인생에 있을까요?


나는 이제, 글이라는 방식으로라도 그런 관계를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의 말들이 누군가에게 지나간 기억들을 되살리는 구름 한 자락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00번째의 자리에 도달한 지금, 나는 다시 처음처럼 쓰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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