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들

수필

by bony

집안을 꽉꽉 메운 고요한 공기의 높은 밀도가 느껴지는 어젯밤. 세상을 찢듯 달려드는 야수 같은 천둥이 포효했다. 심장이 새해를 맞이하는 보신각의 종처럼 '우웅'하고 요동쳤다.

그리고 이내 몇 날 며칠을 아파트 단지 내에 일렬로 세워져 있는 벚꽃 나무를 보던 내가 떠올랐다.


흰머리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내 뒷모습.

나는 살짝 안경을 아래로 내린 다음, 잘 보이지 않는 꽃봉오리를 뚫어져라 봤다. 분홍색의 뭔가가 보이는데...


어린 시절, 숨바꼭질에 술래가 되기 싫었던 내가 떠올랐다. 공동 재래식 화장실에 코를 막고 숨어 있었던 그때. 절대 술래가 찾을 수 없었지. 아이들이 다 집에 돌아간 후에야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꼭꼭 숨어라. 너의 흰색꽃이 보이지 않게...


계속 보니 눈이 아파 오기에 다시 안경을 바로 고쳐 쓰고 다음을 기약했다.

그리고 이틀 전 난 그제야 '헤헤, 나 여기 있어!'라고 머리를 긁적이며 나오는, 활짝 꽃봉오리를 터트린 선한 얼굴들을 보았다.

내 얼굴도 역시 주름 가득한 웃음 할미꽃이 피었다.


그런데...

비가 내리다니!

벚꽃이 젖은 바닥에 축쳐진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지 않기를 간곡히 기도했다.

그리고 오늘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내 시선은 빗방울이 맺혀있지 않길 바라면서 거실 창문으로 향했다. 비가 그쳤다. 벚꽃이 '무슨 일 있었어?'라고 말하듯 모진 비바람에도 밤새 안녕했다. 급히 남편의 도시락을 챙긴 다음, 시금칫국에 밥을 말아 후다닥 마시듯 먹고 가방을 메고 길을 나섰다.

'도서관으로 가자! 벚꽃 구경하면서~~!'

발가락이 꼼지락거리더니 낡은 운동화를 신고 나갔다. 한껏 기대했던 것과 같이, 아파트 단지 내에 롯데월드 퍼레이드의 공주님처럼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도도하게 벚꽃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직도 비는 내리지만, 그 기세를 꺾을 만큼 독한 비가 아니었다. 그저 콘크리트 바닥에 진회색의 동그란 무늬들을 듬성듬성 찍어낼 뿐이었다. 별거 아니다.

평소 애정하는 가벼우면서도, 투명한 싸구려 우산을 받쳐 들고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벚꽃이 우산에 한 폭의 수묵화가 되어 찍혔다. 벚꽃의 실물을 보기 위해 난 비를 맞음에도 불구하고 내 시야를 가리는 우산을 치웠다.


꽃구경을 한참 한 후, 도서관에 들렸다가 책 한 권을 후딱 읽고 나니 배가 슬슬 요동치기 시작했다. 누군가 부스럭 하는 소리를 냈는데 귀가 쫑긋해졌다. 코는 맛난 냄새를 찾고 있었다. 좀 더 있으려다가 꼬르륵소리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도서관에서 나와 길 모퉁이를 돌아 횡단보도에 다다랐을 때였다.

허리를 잔뜩 구부린 할머니가 이제 곧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처럼 엉덩이를 뒤로 힘껏 빼고는 엉거주춤 서있었다. 깊게 파인 눈가엔 붉은빛의 흰자가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양손으로 뻗은 고목나무 같은 손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힘없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난 할머니의 손을 잡아 드렸다.

"고. 맙. 다." 맥없는 친절한 목소리가 내 귀에 속삭였다.

자세히 보니 단추가 달린 얇은 하얀 스웨터에 군청색 두툼한 바지, 눈꽃만큼 하얀 신발, 화려한 반지와 비싸 보이는 돋보기안경을 쓰고 계셨다. 얼마나 헤매신 건지 주름이 가득한 오른쪽 눈 밑에는 조그마한 나무 이파리가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또 휘청거리시다가 털썩 길바닥에 힘없이 주저 앉았다. 일어날려고 하시길래 앉아계시는게 좋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치매로 돌아가신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도 자꾸 집에 가시겠다며 길을 나서곤 했지만, 오랫동안 누워있으셔서 걷는 게 쉽지 않으셨다. 엄마를 말리다가 어떤 날은 엄마가 나가시게 그냥 두었다. 그리고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엄마는 집 앞에 20미터도 못 가서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의 할머니처럼 기저귀를 찬 헐렁한 바지가 길을 막았다.

그리고 난 십 년 전 우리 엄마와 같은 누군가의 엄마와 마주하고 있었다.

'119'

머릿속에 그 숫자가 스쳤다. 하지만 불행히도 내 휴대폰은 배터리가 나갔다. 마침 지나가는 하얀색 SUV가 우리 앞에 멈췄다. 아저씨 두 분이 119에 전화를 걸어주고는 5분 뒤에 곧 구급차가 오니까 차가 오면 손을 흔들라고 하고 가셨다.

"어르신, 댁이 어디세요?"

"저기야!" 횡단보도 건너편, 연수 1차 아파트를 가리켰다.

"언제 나오셨어요?"

"한참 됐어."

"119 불렀으니 좀 만 기다리세요."

할머니는 자꾸 일어서서 걸으시려고 했다.

그때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한 스무 살 정도 보이는 커트머리의 한 여자가 말을 걸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아니에요. 119 불러서 괜찮아요."

"네." 여자는 이후에 묵묵히 할머니 옆을 지켰다.

그리고 곧 중년의 인상이 좋은 한 아저씨가 언제 달려왔는지, 우리 곁으로 다가와 자초지종을 묻고는 주저앉아 있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왜 이렇게 119가 안 오지요? 언제 전화하셨어요? 날도 추운데..."

"5분 전에 전화했는데요. 곧 올 텐데. 안 오네요."

"어르신, 휴대폰은 가지고 계세요?" 아저씨가 물었다.

"아니, 집에 두고 왔어."

그리고 곧 구급차가 오른쪽 길목에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는 할머니를 조심스레 부축해서 구급차에 타는 것을 도와드렸다.

나는 젊은 여자와 아저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제야 여러 방향으로 흩어졌다.


할머니는 가족의 품으로 잘 돌아가시겠지?

난 아른거리는 할머니의 붉게 충렬 된 눈을 잊지 못한 채로, 집 앞에 다다랐다.


아파트 입구를 지나 2동으로 향하는 길, 멀리서 벚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주위에는 가지마다 피어 있는 선한 벚꽃이 정말로 무수히도 많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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