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게임과 일상의 경계에서 시작하는 아주 작은 기록
고등학교 2학년.
누군가에게는 입시의 시작점이고, 누군가에게는 사춘기의 끝자락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그저 지나가야 할 365일일 뿐인 시간. 나에게 이 시간은 조금 특별한 의미로 기억될 것 같다. 게임이 단순한 취미를 넘어, 나를 이해하는 하나의 언어가 되어버린 해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게임을 엄청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게임에 미쳐 사는 사람도 아니다. 학교 끝나고 PC방에서 밤을 새우는 친구들을 보면 때로는 부럽기도 하고, 때로는 '저렇게까지 빠져도 되나?' 싶기도 하다. 나는 그저 평범하게, 조금은 소심하게, 가끔 외롭게 살아가는 열여덟 살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게임을 할 때만큼은 조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현실에서는 발표 한 번 하는 것도 떨리고, 반 아이들 앞에서 농담 하나 던지는 것도 조심스러운데, 게임 속에서는 용감하게 보스 앞에 서고, 때로는 과감한 선택을 하고, 실패해도 다시 도전한다. 왜일까? 세이브 파일이 있어서? 리셋이 가능해서? 아니면 그저 아무도 날 보지 않기 때문일까?
요즘 나는 자주 생각한다. 게임이 나를 도망치게 만드는 걸까, 아니면 나를 견디게 하는 걸까. 선생님들은 게임을 시간 낭비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나는 게임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인내를 배우고, 선택의 무게를 알고, 실패를 받아들이는 법을 익히고, 때로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이 글은 그런 이야기다. 고2라는 어정쩡한 시간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 게임을 통해 발견한 작고 소중한 것들에 대한 기록. 누군가에게는 유치하게 들릴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공감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솔직한 이야기.
게임과 나, 그리고 시작
내가 게임을 처음 시작한 건 초등학교 때였다. 닌텐도 wii를 받아 <슈퍼 마리오 갤럭시> 를 해본 게 시작이었다. 그때는 그저 재미있었다. 웃고, 지고, 이기고, 다시 하고. 그게 전부였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게임은 조금씩 달라졌다. PC방에 가는 친구들을 따라 <발로란트>를 시작했고, 스마트폰에 <브롤스타즈>를 깔았다. 그러면서 게임은 단순한 놀이를 넘어서, 친구들과의 연결 고리가 되었다. 학교에서 말 한마디 못 붙이는 아이들과도, 게임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었다. "야, 오늘 저녁에 한 판 ㄱㄱ?" 이 한 마디면 충분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올라오면서, 게임은 또 다른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더 이상 친구들과 함께 즐기는 시간만은 아니었다. 점점 혼자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학원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게임을 시작하는 밤들. 그 시간은 외롭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장 나다운 시간이기도 했다.
고2가 되면서 주변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이제 슬슬 공부 좀 해야지 않냐"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렸고, 실제로 많은 친구들이 게임을 줄이거나 아예 끊었다. 학원 스케줄이 빡빡해지면서 PC방에 가는 것도 사치가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게임을 놓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놓고 싶지 않았다.
게임이 죄가 된 순간들
"너 요즘 게임만 하냐?"
선생님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실망이 섞여 있었다. 중간고사 성적이 나온 날이었다. 수학이 5등급이었다. 사실 게임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학 자체가 어려웠고, 수업을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안 됐고, 문제를 풀다 보면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엄마 눈에는 내가 게임만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게임 그만하고 공부 좀 해. 너 이러다가 대학 어떻게 갈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게임 때문이 아니라고 변명하기에는, 실제로 게임을 꽤 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억울하기도 했다. 게임을 한다고 해서 공부를 아예 안 한 건 아니었고, 친구들 중에는 나보다 훨씬 많이 하면서도 성적이 좋은 애들도 있었으니까 담임 선생님은 "중독되면 안 돼" 하셨다. 중독. 그 단어가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나는 중독된 걸까? 게임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걸까?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정말 게임이 나쁜 걸까? 게임을 하는 시간이 낭비일까? 만약 게임을 안 했다면 나는 정말 더 나은 학생이 되었을까? 답은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게임을 할 때만큼은 내가 조금 더 편안하다는 것. 그게 나쁜 일일까?
현실과 게임, 그 사이의 간극
고2라는 시간은 참 애매하다. 고1 때는 "적응 기간이니까" 하고 넘어갔고, 고3이 되면 "수능 준비"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을 텐데, 고2는 그 사이에 끼어 있다.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시간. 그래서인지 더 불안하고, 더 조급하고, 더 혼란스럽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면서, 나는 점점 게임에 더 빠져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핸드폰을 들어 게임 출석 체크를 했고, 학교 쉬는 시간에는 공략 영상을 봤다. 숙제는 나중에 해도 되고, 공부는 내일 해도 되지만, 게임은 지금 해야 했다. 왜냐하면 게임 안에서는 내가 무언가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뭘 해도 티가 안 났다. 하루 종일 공부를 해도 성적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하지만 게임 속에서는 달랐다. 레벨이 올랐고, 아이템을 얻었고, 업적을 달성했다. 작은 성취들이 쌓여가는 게 눈에 보였다. 그게 좋았다. 적어도 게임 안에서는 내가 발전하고 있다는 게 확실했으니까.
물론 그게 허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게임 속 레벨이 올라간다고 해서 내 인생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고, 아이템을 모은다고 해서 대학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은 나에게 위안이었다. 적어도 게임 안에서는 내가 무능하지 않았고, 쓸모없지 않았고, 의미 있었으니까.
게임 속에서 만난 나
게임을 하다 보면 신기한 순간들이 있다. RPG 게임에서 선택지를 마주할 때, 나는 항상 고민한다. '착한' 선택을 할까, '나쁜' 선택을 할까? 현실에서는 당연히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게임 안에서는 다르다. 때로는 악당이 되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무모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지켜본다.
어느 날, <페르소나 4 더 골든> 이라는 게임을 하면서 깨달았다. 내가 게임 속에서 하는 선택들이, 사실은 현실에서 하고 싶지만 못하는 선택들이라는 것을. 게임 속에서는 과감하게 반항할 수 있고, 위험을 감수할 수 있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최악의 경우,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 번의 선택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기도 하고, 실패하면 다시 시작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항상 조심스럽고, 소극적이고, 안전한 선택만 한다. 발표를 안 하고, 의견을 말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는다. 그게 편하니까. 그게 안전하니까.
게임은 그런 나에게 작은 연습장이 되어주었다. 실패해도 괜찮은 공간. 용감해져도 되는 순간. 나답게 살아도 되는 시간. 물론 게임 속 용기가 현실의 용기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게임을 통해 '나는 이런 선택도 할 수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혼자, 하지만 외롭지 않은
게임을 하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은 '고독'과 '연결'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혼자 방에서 게임을 하지만, 화면 너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온라인 게임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과 협력하고, 경쟁하고, 때로는 대화를 나눈다.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분명 진짜다.
어느 날 밤, <발로란트>를 하다가 팀원 한 명이 채팅을 쳤다. "오늘 시험 망쳤어. 게임이나 하자." 나는 "나도 성적 별로야" 하고 답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몰랐지만, 그 순간만큼은 같은 배를 탄 사람들 같았다. 우리는 함께 게임을 하고, 지고, 웃고, 또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조금 덜 외로웠다.
게임은 때로 위로가 된다. 말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순간들. 현실에서는 친구들에게 "요즘 힘들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부담스럽고, 무겁고, 어색하다. 하지만 게임 안에서는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고, 같은 목표를 향해 가고 있으니까.
물론 게임이 모든 외로움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게임을 끄고 나면 여전히 혼자고, 여전히 조용하고, 여전히 텅 빈 기분이 든다. 하지만 적어도 게임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이 에세이를 시작하며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건 얼마 전이다. 게임을 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나는 왜 게임을 할까?' 단순히 재미있어서? 현실이 힘들어서?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내가 해온 게임들을 되돌아보기로 했다.
콘솔 게임, PC 게임, 모바일 게임, 보드게임. 장르도, 플랫폼도, 방식도 모두 달랐지만, 그 안에서 느낀 감정들은 비슷했다. 설렘, 좌절, 성취, 외로움, 연대. 게임을 통해 나는 많은 것을 느꼈고, 배웠고, 깨달았다.
이 에세이는 총 21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콘솔 게임, PC 게임, 모바일 게임, 보드게임으로 나누어, 각 플랫폼에서 경험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화려한 문장도, 거창한 철학도 없다. 그저 고2 학생 한 명이, 게임을 하면서 느낀 솔직한 감정들을 적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게임 중독자 변명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철없는 애 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그저 기록하고 싶었다. 고2라는 이 시간이 지나가기 전에, 게임이 나에게 무엇이었는지 남기고 싶었다.
엔딩은 아직 멀었지만
게임에는 엔딩이 있다. 보스를 물리치거나, 스토리를 완료하거나, 목표를 달성하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그리고 우리는 "아, 끝났구나" 하며 게임을 종료한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 뚜렷한 엔딩이 없다. 고2가 끝나면 고3이 되고, 고3이 끝나면 대학생이 되고, 그렇게 계속 이어진다. 어디가 중간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때로는 불안하고, 때로는 막막하다.
게임을 하면서 나는 깨달았다. 엔딩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게임의 진짜 재미는 엔딩에 도달하는 과정, 그 여정에 있다는 것을. 레벨을 올리고, 퀘스트를 수행하고, 동료를 만나고,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는 그 모든 순간들이 게임을 의미 있게 만든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대학에 가는 게 엔딩이 아니고, 취업을 하는 게 엔딩이 아니고, 결혼을 하는 게 엔딩이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은 그저 하나의 체크포인트일 뿐. 진짜 중요한 건 그 사이사이에 있는 작은 순간들, 내가 느끼고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이다.
나는 아직 고2다. 엔딩은 아직 멀었다. 아니, 어쩌면 엔딩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고, 게임을 하고 있고, 내 방식대로 세상을 배워가고 있으니까.
이 에세이는 그런 나의 기록이다. 완벽하지 않고, 정리되지 않고, 때로는 산만하지만, 그게 바로 나다. 게임을 통해 만난 나 자신. 현실과 게임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열여덟 살의 나.
세이브 파일을 저장하듯, 나는 이 순간을 기록한다. 언젠가 훗날, 이 글을 다시 읽으며 웃을 수 있기를. 그때의 나에게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 있기를. 그리고 말할 수 있기를.
"나는 게임을 하면서 조금씩 자라고 있었어."
게임은 계속된다. 내 인생도 계속된다. 엔딩은 아직 멀었지만, 나는 오늘도 컨트롤러를 든다. 다음 스테이지로 가기 위해. 조금 더 나은 나를 만나기 위해.
이제 진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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