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전 이곳 기흥호수 곁으로 이사를 한 것은, 이제 아웅다웅 다툴 상대도, 이웃도, 누구를 위해서 내가 도움이 되어야 할 일도 능력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남은 인생을 덤으로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시간 죽이기로 허투루 보내겠다는 절대 아니다. 하늘이 내게 주실 나머지 생명을 감사히 받아서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하고, 순수하고, 느긋해지고자 함이다. 결코 물러남이 아니라 나아감이며, 포기가 아닌 발전을 위한 노력의 계속이다.
고맙게도 호수 둘레길에서 만나는 나무, 들꽃, 물, 산새... 모두모두 나를 반겨주었다.
차츰 들꽃이 예뻐 보이고, 숲속의 맑은 공기가 향긋하고 달짝하게 안겨 오고, 숲속에서 노니는 새들의 노래소리와 바람 소리의 합창이 들리기 시작함을 느낀다.
계절의 변화에 따른 순리를 좇아 옹골지게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에서 하늘의 섭리를 조금은 깨우치게 되려나
수십 년 만에 처음이라는 폭설이 내린 뒤 한동안 산책을 게을리하다가 연말이 가까워서야 나서게 되었다. 여기저기 잔설이 보이는 황량한 둘레길을 걷는다.
동쪽 길 섬 언덕에는 온갖 잡초들이 그 찬란하고 발랄하던 푸르름을 내주고 처량히 쓰러져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냥 죽은 것이 아니다.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사라져’갔을 뿐이다. 모진 비바람과 병충해와 싸우며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만들거나, 뿌리를 깊고 넓게 뻗게하여 다음 세대를 번창하게 하고는 장렬하게 사라져서 후손의 거름이 되어준다.
서쪽 호수 쪽으로는 수양버들이 마을을 이루고 밑동을 물에 담근 채 잎들을 떨구고 앙상하게 떨고 있다. 가지 여럿이 며칠 전 폭설을 이겨내지 못하여 찢어지고 부러져 측은한 모습이다. 이들은 겸손하게 고개를 푹 숙이고, 바람이 불어도 폭우가 쏟아져도 저항하지 않고 나긋나긋 장단 맞춰 춤추고, 새가 앉으면 그네를 태워주는 착하고 순한 녀석들이다. 근데 살포시 내려앉는 눈송이는 차마 보내지를 못하고, 안아주다 보니 무지막지(無知莫知)한 억눌림을 당했구나. 떨쳐버리지 못한 것도, 미리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길러두지 못한 잘못이구나.
가지에 붙어있는 몇 안 되는 잎은, 추워서인지 영양공급을 못 받아서인지 잔뜩 오그라들어 움츠리고 있다. 저러고도 떨어지지 않는 것은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서일까, 한 맺힌 일로 차마 떨어질 수 없는 슬픈 사연이 있어서일까.
수양버들마을 물 위에는 오리 몇 마리가 한가로이 유영(遊泳)을 즐기며 만들어진 잔물결이 퍼져 버드나무 밑둥을 ‘간질러주고’있다. 시샘도 다툼도 없는 고요와 평화가 여기 다 모여있다.
노닐던 한 녀석이 머리를 물 아래로 내리 꽂고, 궁뎅이와 오리발을 하늘로 솟구치고는 물 속 깊이 사라진다. 유네스코 인류무형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해녀의 자맥질과 너무 닮았다.
‘개는 훌룡하다’? ‘동물은 훌룡하다’?
기흥호수 호반의 동식물은 정말로 훌룡하다. 이들과 함께하는 나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