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를 버릴 때는 스티커를 붙여서 버려야 한다
불완전함의 완전함에 대하여
집에 다리 하나가 없는 의자가 있다. 의자는 집 뒤편 창고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에 놓여 있고, 가끔 거기를 오갈 때마다 안 그래도 삐뚜름한 자세를 더욱 삐뚤게 하곤 했다.
나는 그 의자를 좋아한다. 소복하게 쌓인 먼지들 때문에 거대한 찹쌀 모찌처럼 부드러운 앉는 부분의 질감이 좋고, 팔걸이의 쓸데없이 화려한 장미 조각과 반짝임이 좋고, 가끔 비둘기가 앉았다 간 게 분명할, 등받이의 흰 새똥 자국이 좋다. 가장 좋은 것은 의자가 쓸모없다는 점이다. 어떻게 놓아도 넘어지게 될 게 분명한, 의자의 현재와 미래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다.
고정된 물체와 고정된 의미란 건 얼마나 귀한가.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화, 의식과 인식의 변화가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가변성(可變性)을 견뎌내는 절대성.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달라지지 않는 물체들이 주는 안정감을 퍽 좋아한다. 그것들이 나의 불안과 변덕과 보보(步步)마다 바뀌는 관점들을 현실에 매어놓는 말뚝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 저게 옳지. 돌이켜볼 수 있는 대상이 어딘가 있고, 그것들을 언제든 돌아볼 수 있다면 나도 퍽 괜찮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의자 얘기로 돌아가 보자. 의자는 몇 년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쓸모없다. 높이 놓아둔 물건을 꺼내는 데도 쓸 수 없고, 잠시 앉아서 담배를 태우기에도 불안정하다. 그나마 삐뚜름한 다리 한쪽에 죽은 벌레 같은 것이 끼어있지만, 벌레는 의자 다리에 눌려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을 때쯤 의자 다리 밑으로 기어간 것뿐이다. 뭘 모를 때의 나도 그 의자에 앉았다가 바닥에 엉덩이를 찧은 적 있다. 낮은 진동과 함께 순식간에 더러워진 츄리닝 뒷부분을 털면서 얼마나 구시렁댔던가. 그러나 의자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쓸모없고, 여전히 의자가 아닌 모든 것들을 똑같은 자세로 대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집에선 의자만 그렇다. 이 집마저도 자칫하면 나가야 한다는 조건이 붙고, 그게 아니라도 몇 년에 한 번 도배를 하는 것만으로도 크게 안색이 바뀐다. 가장 견고한 것으로 느껴지는 벽과 방의 규격 또한 쉽게 달라진다. 하루는 옷방이었던 것이 어느 날은 창고가 되는, 이러한 변화가 내게는 마냥 좋지만은 않다. 인간으로서의 나는 몹시 느려서 삶이 흔들릴 때마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적응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겨우 적응했다 싶을 때쯤에는 반드시 또 다른 일이 생긴다. 그러다 보면 결국 어느 시점부터는 포기하게 된다. 적응을, 그리고 견디는 걸.
견디지 않고 적응하지도 않게 된 인간은 매사에 쉽게 화를 낸다. 화는 막다른 길에 서 있음에도 물러나지 않는 거고, 막다른 길이어야 할 일들을 알아내기 위해 제 스스로를 곡괭이처럼 휘두르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얼마나 자주 곡괭이가 되었나. 인정해야 할 일들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쿵, 쿵, 마음이며 생활에 얼마나 많은 흠집을 내었던가. 지금은 반성하고 있지만, 나는 또 그럴 것이다. 싫고 미운 일들을 어떻게든 해보려다가 사라진 의자 다리처럼 내 귀한 것들을 잃어버리겠지.
그래서 나는 집에 있는 의자를 좋아한다. 의자는 이미 잃어보았고, 발버둥 쳐봤고, 지난한 시간을 버틴 후에야 드디어 단단한 것이 되었으므로.
의자의 용도는 앉는 것이다. 앉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결국은 앉는다는 대명제를 벗어나진 않는다. 물론 우리가 의자를 그렇게만 쓰진 않는다. 우리는 의자 위에 올라가 전등을 갈고, 의자 두어 개를 붙여서 침대로 쓰고, 때로는 의자를 던져서 미운 놈 얼굴을 예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의자의 용도와 의자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 의자에게 종종 일어난다는 면에서 의자는 가변적이다. 물론 이유가 있겠지. 그러나 이유가 의자의 불안을 해결해주진 못한다. 불안은 내가 어떻게 될 것 같다는 기분이고, 혹은 나를 뺀 모두가 나를 뒤처지게 만들 거란 예감이므로.
결국 진정한 자유는 역할의 종말이고, 또 관계의 종말이다. 집 뒤편의 의자는 앉을 수 없게 되고, 사람들이 찾지 않게 된 후부터 더욱 견고해졌고, 이윽고 의자를 포기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선택지만을 내게 건넸다.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물론 어딘가엔 방법이 있겠지. 그러나 모두가 방법을 지니기 위해 살아가는 건 아니다. 이미 그렇게 된 것들을 그렇게 되었다고 인정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그런 사람들은 의자를 내버려 둘 것이다. 화도 내지 않고, 굳이 먼지를 닦아내지도 않고 가만히, 의자가 있는 곳에 의자를 남겨둘 것이다. 그래서.
올해가 가기 전에 나는 집 뒤편의 의자를 버릴 생각이다. 버려진 의자와 의자를 버린 나는 다른 길목에 놓일 것이다. 공간이 달라져도 의자는 쓸모없다는 면에서 달라질 게 없고, 나는 의자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그게 최선이었는지 연신 생각하겠지. 잠깐 떠올렸을 뿐인데, 벌써 의자가 이기고 내가 진 기분이다. 내가 더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