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2026년 2월에 개봉하고 네 달이 지났다, 4월 10일 금일 기준 누적관객수는 1,622만 명을 돌파했다. 한국 영화 산업에서 천만 영화라는 타이틀이 주는 무게감은 꽤나 상당하다. 천만이라는 숫자는 대한민국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극장을 1년에 한 번 가는 사람도 영화를 보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COVID-19 이후 비대면 문화가 일상생활에 아주 깊게 자리잡고,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엔터 산업계가 침체를 맞았다. 극장에 가는 사람들이 줄어들었고 자연스레 영화 제작 수 또한 감소했다. 사람들이 영화관을 찾지 않는 이유는 점점 늘어났다. 집에서도 충분히 고품질의 기기로 영화를 즐길 수 있을 뿐더러, 극장에서 볼 영화가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집에서도 충분히 영화를 볼 수 있는데, 굳이 비용을 들여 극장을 찾을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나 또한 그랬다. 작년 국내 최대 관람객 수를 기록한 영화는 약 500만 명 이상이 관람한 <좀비딸>이다. 나도 당시에는 <좀비딸>을 관람했다. 사실 왜 관람했냐고 묻는다면, 친구와 시간이 애매하게 생겼는데 정말 말그대로 볼 영화가 <좀비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볼 영화'란 누군가와 같이 볼, 대중적이면서도 재미있는 영화를 말한다. 그런 영화가 정말 없었다. 이런 때를 생각하면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인한 극장 부흥은 정말 좋은 소식이다. (아, 참고로 영화 <좀비딸>을 디스할 의도는 없다, 그냥 과거의 극장가와 비교하기 위한 예시일 뿐이다)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 속도는 놀라웠다, 개봉 후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극장가에 걸려 있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흥행 속도가 여타 상업영화와 비교해도 정말 빨랐고, 절대적인 관객 수 증가 속도 또한 매우 가팔랐다. 그리고 나는 오늘에서야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조선왕조역사에 가장 비극적인 서사를 지닌 인물인 단종과 유배지인 영월군 마을의 촌장인 엄흥도를 주축으로 한다. 이미 익숙한 역사 서사이다. 특히 단종의 죽음이라는 정해진 결말 앞에서 영화는 새로운 시도를 달리 하지 않는다. 그저 단종의 죽음과 단종과 엄흥도의 이별을 향해 거침없이 달리고 이는 신파적 예측으로 작동하는 모양이 된다. 앞 서 계유정난을 다룬 또 다른 흥행작 <관상>을 통해 관객들은 단종과 수양대군, 한명회라는 인물을 학습한 적이 있다. 감독은 한명회와 금성대군이라는 캐릭터를 새롭게 구축하고 등장 타이밍을 통해 긴장을 축적하려고 했으나 어쩐지 빌런이나 서브 인물은 단편적이고 기능적인 캐릭터에 멈춰버린다. 그렇게 영화는 가열차게 2시간을 달렸지만 그저 익숙한 감정을 반복하며 공감을 유도했을 뿐이다. 갑작스런 슬픔의 정서에 대한 서사적 필연성이 다소 부족했다. 단지 감정 몰입도가 높은 단종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이해하기 쉬운 서사를 구축하고, 안정적인 클리셰를 통해 감동을 유도한다. 이 공식이 결과적으로 작동한 것이다. (호랑이 CG장면 또한 현장감을 방해할만큼의 아쉬운 퀄리티였다..)
천만 영화라는 타이틀 자체는 놀라운 성적이다. 그 부분은 반박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이는 대중의 선택이고 천만 명의 욕망이 발현된 결과이기 때문에. 내가 주목한 지점은 다소 보수적인 소비 구조이다. 현재 우리는 어떤 욕망에 의해 위험을 회피하는 선택을 하고 있는 걸까, 이미 검증된 감정만을 반복 소비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대중은 정말 새로운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일까, 우후죽순과 같은 컨텐츠와 정보의 홍수에 질려 버린 걸까. 반면 글로벌 시장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K콘텐츠들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작품성은 차치하고라도 실험적인 시도를 하는 반면 국내 시장은 그렇지 않다. 동일한 문화권에서 생산된 콘텐츠임에도 왜 소비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선택을 하는 걸까. 이 모든 질문들은 결국 우리가 어떤 영화를 선택하는가로 돌아온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은 새로운 시도의 결과라기보다, 검증된 이야기를 안정적으로 소비한 결과에 가깝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