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면서 웃는다/ 류시화
엄마가 버리고 떠난 아이가
자면서 웃는다
연인에게서 결별 통보를 받은 청년이
자면서 웃는다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는 소녀가
자면서 웃는다
직장에서 해고된 가장이
자면서 웃는다
다리 대신 절단된 면이 있는 노숙자가
자면서 웃는다
암 선고를 받은 여인이
자면서 웃는다
국경 넘어 도착한 나라에서 거부당한 난민이
자면서 웃는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전장의 병사가
자면서 웃는다
낯선 나라로 시집 온 이국의 여성이
자면서 웃는다
단칸방에서 개와 단둘이 사는 노인이
자면서 웃는다
맡을 배역 없는 무명 배우가
자면서 웃는다
회전하는 지구 행성에 등을 대고 누워
모두가 자면서 웃는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수오서재 2024
이 시는 엄마에게서 버림 당한 아기가 자면서 웃는다로 시작합니다. 가슴이 찔리는 건 아기가 아닌 독자지요. 이어 삶의 나락에 떨어진 여러 사람이 등장합니다. 따돌림당한 소녀라던가 다리가 절단된 외국인 노동자, 암선고를 받은 여인 등등입니다. 화자는 그들도 자면서 웃는다고 말합니다.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잠이 들었기에,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세계를 경험하고 있기에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웃음이 더 아름다운 것은 그때가 고통스러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에 우리는 웃음을 잃습니다. 우울한 표정, 더할 나위 없이 힘든 표정을 짓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만듭니다. 엄혹한 시절에는 웃기 힘드니까요. 그 시간들은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살아 있기만 한다면요.
삶은 고해, 고통의 바다라는 의미지요. 석가모니도 스캇 펙도 이런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2007년 이시무레 미치코는 <고해정토: 우리의 미나마타 병>라는 책을 펴냈지요. ‘고해: 고통의 바다’와 ‘정토; 아름다운 땅’이라는 의미의 단어가 나란히 쓰이면서 이 소설은 각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 세상은 고통스럽지만 아름답다는 의미를 띠고 있으니까요.
문득 생각나는 열매가 있습니다. 겨울철에 빛나는 열매지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남천은 겨울철이면 더욱 빨갛습니다. 폭설이 내려 온 천지가 새하얗게 되었을 때 흰 눈을 뒤집어쓴 남천 열매는 보석처럼 빛납니다.
남천이 겨울철에 더욱 아름답듯 혹독한 추위를 견뎌낸 인간도 더욱 아름답습니다. 고통을 통해 성장하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게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