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꽉 막혔을 때

피곤해서 선선하게 좋아 ⑩

by 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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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선택지만 남았을 때

독일 회사에서 포닥(포스트닥터)으로 보낸 2년, 그때 겪은 이야기다.


그때 나는 세 명의 다른 포닥과 함께 같은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계약 기간은 2년, 우리는 서로 다른 사수에게 고용되었고 부서도 달랐다. 경쟁할 이유는 없고, 협력해야 하는 관계였다. 그런데도 묘하게 나를 곱게 보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세상에는 이유 없이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 기류는 결국 1년 후 작은 사건으로 터져 나왔다.


여러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중간 규모의 사내 회의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20분간 발표할 기회를 얻었다. 여러 회의 끝에, 네 부서에서 모인 포스트닥터 네 명이 각자 5분씩 발표하기로 했다. 모두 그 방식에 동의했다. 그 무렵 나는 열흘간의 휴가를 계획하고 있었다. 다행히 돌아오면 발표까지 나흘이 남아 있었다. 발표를 준비할 시간은 충분했다. 그래서 떠나기 전, 나는 나의 계획에 대해 사수와 다른 한 포닥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행히 모두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돌아와 보니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두 포닥이 각 10분씩 맡게 되었고, 내 파트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른 한 명은 바쁜 일정으로 이미 빠져 있었고, 결국 발표자는 둘로 압축돼 있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포닥들에게서 들었을 때, 솔직히 당황스럽고 서운했다. 왜냐하면, 열흘 전 나는 발표를 맡게 된 두 사람 중 한 명과 이미 회의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하나였다.


“더는 회의할 시간이 없어. 내일 사수들께 피드백받고 끝낼 거야. 애초에 우리가 먼저 발표하겠다고 사수에게 말했고, 네가 발표자로 들어온 건 나중이잖아. 너는 두 달 뒤 다른 회의에서 다른 얘랑 둘이 발표하면 되잖아.”


가장 놀라웠던 건 그들의 태도였다. 미안함은커녕, 오히려 당당함이 먼저였다.


발표는 4일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 사수는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눈앞의 동료들은 더 이상 협상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들이 나보다 물리적으로 훨씬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회의를 하려면 일과 후 시간을 따로 내야 했으니, 부당하더라도 일단 양보의 미덕을 발휘해 내가 빠지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이제 내 선택은 두 갈래였다. 팀워크를 생각한다면 양보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발표할 자신이 없어서 물러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사수들 앞에서 포닥들끼리 발표자 자리를 두고 싸웠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ㅎㅎ) 동료랑 싸워서 내 자리를 지키거나, 아니면 바보가 되거나...




도망칠 타이밍

박사 시절, 이런 갈등 앞에서 현명한 태도를 보였던 선배 포닥이 문득 떠올랐다. 그 선배는 맞서지 않았다. 그는 갈등의 자리를 조용히 벗어났다. 그리고 그는 그의 교수에게 메일을 보내며 그의 분노를 대신했다. 나는 순간 그가 떠올랐고, 나도 그의 방식대로 물러섰다. 나는 이미 퇴근한 사수에게 메시지로 짧게 상황을 설명했다.


'회의에서 특정 포닥 두 명이 저와 더 이상 토론을 원하지 않아, 결국 두 사람이 발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저로서는 다소 아쉬웠지만, 발표가 나흘 앞으로 임박했고 동료들도 이미 큰 부담을 느끼고 있어 추가 논의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발표 날까지 병가를 내고, 집에서 푹 쉬기로 했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억울한 감정은 여전했지만, 최소한 내 건강과 마음은 챙겨야 했다. 더불어, 사수들이 그저 성과만 중시한다면,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 발표가 잘 마무리됐을 것이니 내 잘못은 없다. 반대로 공정함에 무게를 둔다면, 나는 병가를 통해 부당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병가 후 회사로 돌아왔을 때, 상사는 어딘가 복잡 미묘한 표정의 얼굴이었다. 나는 그 이상한 표정을 바라보며, 그날 다른 포닥들과 미팅에서 있었던 일들을 차분히 설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대답했다.


"너를 이해해. 내 생각에는 데리카(문제의 포닥 중 한 명, 가명)가 이 문제를 만든 것 같다."


적어도 내 사수는 공정한 발표를 원했으며, 더불어 이 문제의 출발점이 누구인지도 정확하게 파악을 한 것 같아 일단 안심이 되었다.




나에게도 봄은 찾아오는가

병가 이후, 나는 다른 동료들에게 이번 일을 털어놓으며, 나 혼자 발표할 수 있는 자리를 찾고 있다고 알렸다. 사수에게도 물어봤지만, 그는 당분간 큰 발표 일정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동료에게서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다른 부서에서 내 전문 분야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큰 프로젝트는 아니고 작은 규모라 들어가도 괜찮을 거라 했다. 게다가 그녀는 “발표 한 번 하는 것보다 다른 부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게 훨씬 영향력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길로 나는 해당 프로젝트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냈고, 참여할 준비를 했다. 사실 내 회사 계약은 그 문제의 프로젝트와 묶여 있었기에, 다른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2년짜리 프로젝트 계약직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나의 주 업무를 거의 마친 상태였고, 게다가 불쾌한 일까지 겪은 터라 사수도 허락해 주었다.


이 결정은 내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됐다. 아이러니하게, 새롭게 참여한 프로젝트에서도 네 명이 돌아가며 5분씩 발표하는 일이 또 있었다. 이번에는 갈등 하나 없이, 준비부터 발표까지 무사히 끝났다. 더불어, 사수가 또 다른 프로젝트의 마지막 단계에 나를 합류시켜 주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협업을 잘해 사수에게 칭찬까지 들었다. 봄이 오듯, 내게 자신감이 돌아왔다. 다시 한번 깨달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함께 일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작은 쿠키

사수가 어느 날 내게 말했다.


“네가 이번에 겪은 건 그리 큰 갈등은 아니야. 그러니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회사 생활하다 보면 훨씬 심한 일도 많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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