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해서 선선한게 좋아 ⑨
[이전글 바로가기] ⑧ 프라다를 입은 악마는 질문을 원해
여기서 말하는 ‘둘리’는 1억 년 전 옛날을 그리워하는 아기 공룡 둘리가 아니다. 내 남자친구다. 숱 적은 머리, 앞에만 불룩한 올챙이 배, 그리고 가끔 부리는 성질까지. 내 눈에는 영락없는 아기 공룡 둘리 같아, 자연스레 애칭이 되었다.
둘리와 나의 첫 1년은 여느 커플과 다르지 않았다. 서로를 아껴주고, 다정함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2년 차부터는, "작년 둘리는 어디 멀리 떠났니?" 하고 우스갯소리로 농담할 정도로 서로 편안해졌다.
다행히 나는 편안함이 설렘보다 더 좋은 사람이다. 설렘은 한 번의 다툼으로 사라질 수 있는 신기루 같은 존재지만, 편안함은 연인 사이의 다툼이 소나기처럼 몰아쳐도 끝내 자리를 지키는 든든한 기둥 같은 존재다. 그런데 문제는, 그 편안함 위에 피어난 작은 싹이었다. 바로 ‘잔소리’.
남자친구란
시간이 흐를수록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업데이트 오류가 나는 존재 인가...
그 오류 메시지를 매번 받은 건 나였고, 그게 하나둘 쌓여 잔소리로 터져 나왔다. 문제는 잔소리란 놈은 잡초 같아서 뿌리를 내린 뒤로 멈추질 않았고 오히려 영역을 빠르게 확장해 나갔다. 결국 밝았던 둘리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고, 어느 날엔 폭발을 하고야 말았다.
몇 년 전 한국에서 신년운세를 보러 갔을 때 무속인 할머니께서 가장 마지막에 해주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너희 둘은 잘 맞는 인연이지만, 만약 헤어진다면, 그 원인은 바로 너의 강한 성격 때문이야. 네가 알아둬야 할 게 있어. 둘리는 다툼 되게 싫어해. 그래서 네가 계속 부딪히고 스트레스 주면, 둘리가 이 관계를 끝내버리려고 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둘리한테 잘해!”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무한도전 속 ‘그랬구나’ 게임이 떠올랐다. 박명수와 정준하가 손을 잡고, 서로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던 장면. 나도 둘리에게 말했다.
“둘리, 나한테 손 줘봐. 지금부터 네가 하고 싶은 말 다 해. 나는 반박하지 않고 ‘그랬구나’만 할게.”
둘리가 조심스레 꺼낸 말.
“어느 순간부터 넌 내 행동에서 부정적인 면만 찾는 것 같아.”
내가 답했다.
“그랬구나. 내가 너의 좋은 면은 보지 않고 나쁜 점만 보고 있었구나. 네 마음을 알겠다.”
둘리가 이어 말했다.
“너는 일이 바쁜 와중에도 시간 내서 자꾸 내 단점만 찾는 느낌이야.”
내가 이어 말했다.
“그랬구나. 내가 짬 내서 계속 네 단점만 찾았구나. 네 마음을 알겠다.”
...
둘리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고,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둘리도 생각보다 쌓인 게 많았구나... 잔소리하는 나만 스트레스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녀에게 잔소리를 하면 안 된다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인가?'
다음 날, 변화가 있었다. 나는 어제보다는 확실히 잔소리를 줄이고 둘리를 더 예뻐해 주었고, 둘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우리 둘리 왔어?”
“오늘 뭐 할까, 내 사랑 둘리?”
나는 앞으로 둘리에게 사랑만 주자고 다짐했다. 이윽고, 둘리가 나를 보며 조용히 한마디 했다.
“… 그냥 잔소리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