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해서 선선하게 좋아 ⑧
[이전글 바로가기] ⑦ 외국인과의 연애-2
포닥 2년 뒤, 나는 운 좋게 독일의 어느 대형 회사에 취직했다.
직책은 포스트닥터, 2년 계약직.
계약직이었지만 나는 합격 소식에 나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나는 지난 2년간 함께 일했던 인도 출신 그룹리더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한 시기였다. 하지만 비자 문제 탓에 연구실을 쉽게 떠날 수도 없었다. 실직은 곧 체류 문제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취업은 힘겨운 갈증 끝에 얻은 오아시스 같은 선물이었다. 그 리더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고, 동시에 오랫동안 목표로 했던 회사에 드디어 입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일 뒤에는 나쁜 일이 온다고 했던가. 축복 같았던 취업 합격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차가운 인상의 독일인 사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부서에서 굉장히 똑똑하지만, 날카로운 직설을 잘 날리는 것으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깊이 박힌 미간의 세로 주름이 그 증거였다.
하얀 피부는 온데간데없고 늘 울긋불긋했으며, 키는 크지만 깡마른 다리. 나는 가끔 그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 편집장을 떠올리게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나는 그의 독일식 영어 발음은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짧고 추상적으로 말하는 그의 화법이었다.
그는 늘 내가 맡은 프로젝트에 대해 두세 마디만 던지고 사라졌다. 나는 주어진 일을 스스로 풀어내려 애썼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혼이 났다. 회사에서 원하는 건 끙끙대며 혼자 문제를 푸는 사람이 아니라, 모르면 바로 묻고 빨리 풀어내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내 주변에 내 프로젝트와 겹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고, 주변 동료들에게 질문을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미안, 난 그 분야를 잘 몰라.”
그러다 보니 나는 결국 그에게 다시 물어봐야 했다. 하지만 그의 애매한 설명력 때문에 질문하기가 늘 꺼려졌다. 그의 설명은 짧고, 두리뭉실했다. 더욱이 마침 다른 부서에서 나보다 1년 먼저 취업한 동료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회사에서는 포스트닥터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나의 사수에게서 제대로 된 피드백을 받은 적이 거의 없어.”
나는 나의 사수가 일에 대해 대충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믿어버렸다. 그리고 그 판단은 결국 재앙을 낳았다.
어느 날 나의 사수는 폭발했다.
“너는 왜 질문을 안 하니? 너,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질문한 적은 있어? 이거 문화차이야?”
그때 그는 어떤 대답도 듣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동시에 나는 억울함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본인이 설명을 못해서 이 꼴을 만들어놓고, 나한테 화를 내?'
하지만 이런 갈등은 단 한 사람만의 잘못으로 생기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잘못이 없다 해도, 분명 1퍼센트쯤은 내 기여가 있다. 나는 일단 내 감정을 레몬즙 짜듯 꽉 짜내서 버리고, 이 갈등의 핵심을 되짚어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친 건 국내 석사 시절의 기억이었다. 내 말을 왜곡해 다른 연구원들과 무리를 지어 뒤에서 내 흉을 보고,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려 했던 선배. 그 선배는 내가 잘 되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거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앞의 이 사람은?
‘최소한 그는 지금 나와 소통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지금 내 기분은 엉망이지만, 그의 말을 들을 가치가 있어.
이건 하늘이 내게 준 숙제 같은 거야.
그리고 나는 그 숙제를 그냥 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다짐했다.
이제는 그의 말이 이해될 때까지 꼬리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담판을 짓기로.
그날 이후, 나는 달라졌다.
사수와 미팅을 하면
내가 그의 말을 어디까지 이해했고,
어디서 막혔는지를 정확히 짚어 말했다.
실제로 노트와 펜을 꺼내 이해한 것과 이해하지 못한 것을 그리며 설명하자, 그는 차분히 대답을 이어나갔다. 놀랍게도 그의 설명은 전에 비해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와 제안들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더불어 그는 바쁘더라도 늘 시간을 내어 성심껏 피드백을 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효율적인 방법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는 부하직원이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면 아낌없이 피드백을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제야 나는, 그가 왜 나에게 화가 났었는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나에게 말했다.
“너 많이 성장했어.”
돌아보면, 나는 늘 그런 윗사람을 원했었다. 내가 막힐 때마다 해법을 주는 척척박사 같은 사람. 학계에서는 끝내 만나지 못했던 그를, 마침내 이곳에서 만났다. 하지만 그와 내가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딱 2년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