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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시라노

흰 것만 주고 싶은 시라노의 마음

by 김가비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히 필요했다. 절친한 수의사 선생님의 춤 공연이 있어 그 공연을 계기로 시간을 만들었다. 뜨거운 열정의 공연 뒤에 삶을 예술로 채워가는 우리에게 하늘은 까만 새벽에 하얀 함박눈을 선물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예술의 전당의 전시와 공연 몰아보기를 하면서 영혼에 물주기. 카라바조와 고흐의 전시를 고민하다가 카라바조를 선택했고 미리 예매해 둔 뮤지컬<시라노>까지 시간이 남아 미쉘 앙리전을 봤다. 카라바조 보다 미쉘 앙리가 더 좋았고 혼자 예당 올 기회가 흔치 않겠다 싶어 기대 없이 예매한 뮤지컬이 결국 나를 오열하게 만들었다.


「하루 또 하루

한 장의 종이 위에

조용히 빛나는 사랑이


하루 또 하루

한 장의 종이 위에

바래지 않는 내 사랑이

글자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아

당신이 오늘도 기다릴테니....


-뮤지컬 <시라노> 하루 또 하루 중에서 」


편지를 안 써본 사람은 없겠지. 하지만 1년을 매일같이 써 본사람은 얼마나 될까. 2년을 매일같이는 써본사람은 더 흔치 않을 것 같다. 매일 편지를 쓴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기도 하지만 어느 기간을 지나면 진심의 마음 그 이상의 인내와 창의적 시도까지도 필요한 그것, 그런 편지를 매일매일 750통을 매일 썼던 사람이 바로 나다. 그 때의 진심을 돌아보면서 내가 달라졌을까 생각해본다. 아마도 나는 아직도 그때의 순수한 마음을 꺼내 망설임 없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바보같이 그 때 20대 마음 그대로라는 것이 많이 안쓰러웠달까. 나의 소중한 진심을 적정한 사람에게 적정한 시기에 전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안타까움이 온몸을 감쌌다.


시라노의 진심, 한 장의 종이 위에 조용히 빛나는 사랑을 담았던, 글자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아 기다리는 이를 위한 마음. 그 진심을 백분 공감하며 흘렸던 눈물은 결국 죽을 때까지 자신이 그 편지를 쓴 당사자라는 것을 밝히지 못하는 순수함을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순수함을 지킨다는 것은 때로 많은 것을 댓가로 한다. 이득을 포기하기도 해야 하고 바보같다는 소리도 감내해야 한다. 무모하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극중의 대사에 등장한 돈키호테의 삶과 닮은 구석이 많은. 가만히 조용히 불의를 눈감기보다는 일단 달려가서 그게 아니라고 소리쳐보는.


시라노보다는 비겁하게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져야 하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고 매 순간 처한 현실을 이겨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으며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을 지키려고 했던 나의 마음, 그 순수를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시시콜콜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렇게 열심히 해나가고 있어요 하고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걸 알아주는 사람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감은 고사하고 혼자서 견뎌내야 했던 지나간 시간들이 되돌아 스쳐갔다. 프랑스도 지켜야 하는데 사랑은 또 짝사랑이 되어 그걸 죽는 순간까지 소중히 지키려고 했던 시라노와 내가 같은 삶을 살진 않았지만 같은 결을 가진 사람임을 확인하고서 조용히 읊뇌어보았다. 수고했어. 열심히 살았고 누가 인정해주길 바라고 한 건 아니지만 너무 외롭고 힘들었겠다 하는 공감의 마음. 그 마음이 눈물 버튼을 콱 눌러 버린 것이다.


당연히 음악적인 완성도, 연기 다 좋았지만 이 뮤지컬이 더없이 좋았던 특별한 이유를 꼽아보라면 악역이 없었던 것이겠다. 초반부터 시라노와 대척점에 있는듯한 백작도 끝내는 시라노와 같이 프랑스를, 그리고 록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마지막까지도 시라노처럼 록산을 맴돌며 자신의 사랑이 치기어린 장난이 아님을 증명한다. 록산을 두고 삼각을 벌인 크리스티앙 역시 록산을 향한 진심의 마음을 보여주었고 그랬기에 시라노가 그들을 이어주기 위한 아픈 결정을 한 것. 그러니 록산은 모두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지 헷갈릴 수밖에 없기도 했겠다.


어쨌든 나는 모두의 사랑을 받는 록산보다는 혼자 사랑하며 끝내 마음을 전하지 못한 시라노에 공감을 더 해버리고 말았으니 짝사랑, 외사랑 전문가가 맞나보다. 적절한 타이밍에 진심이 통한다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같은 일인지도 다시 확인해본다. 에이 그렇게 기적같은 사랑도 뭐 사람이 늘 하는 것 아닌가. 대단한 것은 아니라며 합리화도 해본다. 사랑도 대부분의 성공법칙과 같이 포기하지 않으면 실패는 없다고 합리화의 퍼즐을 맞춰보지만 실패하지 않기 위해 사랑에 정진하는 것도, 실패하는 것을 선택해 사랑을 두고 뒤돌아서는 것도 아프고 어려운 것이 또 사랑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한 뮤지컬 시라노, 한동안 시라노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다.


마무리하며 다시 시라노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얼마전 읽었던 한강의 <흰>의 글귀가 떠오른다.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한강의 <흰> 중에서」


흰 것만을 주고 싶은 마음.

이 마음을 주었는데 더럽혀질까 고민하지 않기로 한 마음.

이 마음을 주어도 될까 말까 고민하지 않기로 결정한 마음

그것이 시라노의 마음이고 내가 닮고 싶은 마음이고 내가 잡고 싶은 마음이었나보다.

내용도, 캐스팅도, 음악도 어떠한 정보도 없이 봤던 1차관람과

1차 보고 너무 감동해 1주일만에 다시 부산 사람 서울행 하게 만든 2차 관람! 라이브의 감동을 뜨겁게 느끼며 나는 어떻게 이런 공연을 구현할 것인가 하는 고민도 해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Eu35G94xN7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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