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들deux맘 Apr 22. 2024

아버지의 잠꼬대


회의가 끝나고 수업준비를 마치니 새벽 5시.

퇴근을 하려고 학원 문을 나서는데,

원장님이 퇴근을 하신다. 


영주 지금 퇴근하니?

네 선생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이른 새벽

하루를 시작해야 해야 하는 시간에 입시 전쟁터, 대치동 학원가의 강사들은 하루의 '시작'이 아닌 '마무리'를 한다.


밤 낮이 바뀐 채 바쁘게 살아가는 쳇바퀴 도는 일상에 진절머리가 난다. 

엄마에게 다 포기하고 싶다고 엊저녁에 전화로 하소연을 해 보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는다.


산적되어 있는 수업준비 및 교재 만들기 작업을 생각한다.

그리고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며 스스로를 다그친다.

자다가도 정신이 번쩍 드는 두 글자.

내신! 준비 기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


다음 날, 학원 수업을 하고 있는데 문 틈으로 살짝 아버지의 실루엣이 보였다.

김포에서 대치동까지 한 걸음에 출동하신 아버지,

나를 위로해 주시려고 오셨나 보다.


난 아버지와 단 둘이 있는 것이 어색했다.

무뚝뚝한 아버지와  더 무뚝뚝한 딸,

학원에서 한티역까지 걸어오는 길까지 대화 없이 걸었다. 그리고는 힘겹게 한 마디 하신다.


60이 넘으니 이제야 사업을 어떻게 제대로 하는지 알 것 같다는 아버지.


영주야, 힘드니?

힘내라. 잠시 쉬어갈까? 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업얘기였다.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매일 새벽 4시가 되면 어김없이 대문을 열어 신문을 가지고 오셨다.


편한 소파를 두고 방바닥에 앉아서 매일 같은 시간에 신문을 정독하던 아버지.


엄마는 회상한다.

아버지는 엄마와 연애할 그 시절에도 참 무뚝뚝했다고 한다.

데이트를 할 때면 말없이 그저 부드러운 엄마 손을 하염없이 쓰다듬던 아버지였다고.


20대 중반이었던 그 당시 엄마는 회사에서 아빠를 만났다.

이민이 활발하지 않던 그 시절, 외할머니는 온 가족 이민을 준비 중이었다.


맏딸이었던 엄마는 아빠를 만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지 않았다.

그렇게 엄마는 아빠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되었고 그렇게 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늘 성실했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근면 성실 그 자체였던 바람직한 아버지였다.

일 하시느라 내 초등학교 졸업식도 못 오셨던 걸로 기억한다.

늘 우직하고 성실하게 일하시느라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셨지만, 난 속상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난 늘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성실했던 아버지 덕분에 감사하게도 난 유복하게 자라났다.


수십 년 전 국민학교 당시 우리 집에는 얼음이 나오는 미제 냉장고가 있었다.

그 덕분에 친구들은 우리 집에 놀러 와 ICE버튼을 신나게 누르며 원하는 만큼 얼음을 먹는 신세계를 경험했다.


그 나이 대에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누렸던 어린 시절이었다.

사립유치원, 사립국민학교, 중고등학교 때도 원하면 언제든지 과외를 할 수 있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끝나면 아버지 신용카드를 가지고 백화점에 가서 신나게 쇼핑을 하곤 했다.


유복하고 평범했던 시절을 보내고 내가 성인이 될 무렵이었다.

 

IMF외환 위기가 터졌을 당시에도 끄떡없던 아버지의 사업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평생 우직하게 한 길만 걸어가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회사의 부도로 한 순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나는 영국에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 중이었다.  

영국으로 유학 간 지 8개월 남짓 되었을 때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지의 사업이 끝내 부도가 났으니 미안하지만 다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평생을 무뚝뚝했던 아버지, 모든 사정을 내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뚝뚝한 말투로 딱 한마디 하신다.


"영주야, 네가 원하면 공부 다 마치고 와도 된다."


나는 그 즉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왔다.

성인이 되었고, 지금껏 키워주신 부모님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다.


운 좋게 진입장벽이 낮은 학원강사의 길에 발을 디뎠고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성공했다.

지극히도 평범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본다.

평범한 우리의 삶 속에서 우직하고 성실하게 그 길만을 가는 자의 끝은 행복일까 불행일까?


평범한 일상 가운데 딱히 감사하진 않았지만 주어진 몫을 오롯이 해낸 그 결과는 과연 무엇일까?

평범하기에 흔히 말하는 금수저가 아니기에 열심히 살아냈어야만 했을까?


아이들이 신나게 놀며 집을 난장판을 만든다.

하루 세끼 다 해 먹이느라 집에는 설거지거리가 쌓여있다.

하루에도 몇 벌씩이나 갈아입혀왜 아이들 옷에는 늘 뭐가 잔뜩 묻어있는 걸까?


지극히 평범한 우리네 일상들을 돌아본다.

그 누구도 특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평범함은 특권이다.

한 번 누려보았다고 평생 누리게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여느 가장처럼 평범하게 열심히 일하셨던 아버지를 존경한다.


60이 넘어서야 사업을 어떻게 하는지 깨달았다며 안타까워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나는 진심으로 존경한다.


비록 내게는 무뚝뚝하고, 말 수도 없으셔서 평생 함께 깊은 대화조차도 해 본 기억이 없는 아버지지만,


아버지 그 존재만으로 특별하고 소중하다.


난 아버지에게 우리 딸 예쁘네, 우리 딸 최고야

보통 딸 가진 아빠들이 할 법할 말들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게 서운한 것인지도 모르고 자랐는데, 어느 날 엄마가 말씀하신다.


"영주야 너 그거 아니?

아빠는 잠꼬대로 영주야, 영주야 이름을 부르는 거?"


엄마의 말에 난 그저 피식 웃으며 흘려 들었다.

 

하지만 그 후로 아버지가 주무실 때 나도 모르게 귀 기울여 듣게 되었다.


아버지의 잠꼬대.


피곤한 일상을 마치고 깊은 잠에 빠진 한 아버지.


딸의 이름을 간절하게 때로는 따뜻하게 부르는 아버지의 잠꼬대를 듣는다.


특권이다.


지극히도 평범한 한 아버지의 잠꼬대.


그 잠꼬대로 인해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받는 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잊지 말자.

평범함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