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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의 시대, 복지의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보이스피싱 발본색원을 위한 국가전략

보이스피싱은 감정과 심리를 파고드는 정서적 공략형 범죄이기에, 국가적 복지 치안 전략으로 전환되어야


“아버님, 카드 도용 의심 거래가 발생했습니다. 지금 안전계좌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경찰을 사칭한 목소리는 침착했고, 이어 연결된 ‘금융기관 직원’은 사기범의 말투치고는 너무도 매끄러웠다. 68세의 박 모 어르신은 그날 보험 약관대출을 받아 수천만 원을 송금했고, 나중에야 경찰과 가족들에게 뒤늦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김한준 박사 【평생교육·Life-Plan 전문가

그는 말했다. “나는 평생 정직하게 살아왔는데… 나를 의심하지 않는 착함이 결국 화가 되더라.”

이 사례는 단순한 개별 피해가 아니다. 2024년 기준 국내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6,303억 원에 달하며, 피해자 중 절반 이상은 60세 이상 고령층이다. 특히 평균 피해금액이 1인당 3,000만 원 이상이며, 회복 가능성이 낮아 생계 기반 자체를 잃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심리적 충격은 물론이고, 자녀와의 관계 단절, 극단적 선택에 이르는 후유증까지 보고되는 현실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복지의 붕괴를 시사한다.


『명심보감』에는 “경계가 있어야 재물이 보전된다”는 구절이 있다. 디지털 시대에 이 말은 곧,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더욱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경계심을 오롯이 개인에게 요구하는 사회 구조다. 특히 인지 속도가 둔화된 고령층에게 “의심하라, 확인하라”는 경고는 실질적 안전망이 없는 경계 없는 외침에 불과하다.


지금까지의 대응은 ‘주의하세요’, ‘누르지 마세요’, ‘끊으세요’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보이스피싱은 감정과 심리를 파고드는 정서적 공략형 범죄이며, 그 진화 속도는 법과 제도보다 빠르다. 따라서 이제는 ‘경찰과 검찰의 일’이 아닌, 복지부·금융위·지자체·법무부가 함께 책임지는 “국가적 복지 치안 전략”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고령층 대상 보이스피싱은 단순한 계도나 홍보로 막을 수 없다. ICT 문해력이 낮고, 자녀와 단절된 독거 어르신, 문자에 의존하는 금융 습관을 가진 계층을 위한 방문형 교육, 실제 시나리오 기반 훈련, 지역 커뮤니티 감시망 구축 등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 정보 제공이 아닌, 사회적 돌봄 네트워크를 통한 예방 복지화 전략이다.


해외에서는 이러한 다층적 접근이 이미 제도화되고 있다. 일본은 2023년부터 ‘이상 계좌 실시간 감지 시스템(Real-time Detection of Suspicious Accounts)’을 도입해 피해 발생률을 15% 가까이 줄였고,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는 AI 합성 음성을 차단하는 기술개발 공모를 정부 주도로 진행하고 있다. 기술과 법, 기관 협업이 삼박자로 작동할 때만 예방이 현실화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국가 전략을 검토해야 한다.


첫째, 고령층 고위험군을 선별하여 ‘보이스피싱 경보 대상자’로 지정하고, 가족 연락처와 연동된 실시간 경고·차단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고령층이 사기성 전화를 받거나 송금 시도를 할 경우, 가족이나 보호자에게 알림이 전송되고 자동으로 2차 인증 또는 상담 단계가 개입됨으로써 능동적 예방 체계가 될 수 있다.


둘째, 금융사·경찰청·지자체가 협력하여 ‘실시간 계좌 동결 시스템’을 공유하는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피해자가 한 곳의 신고로도 전국 금융기관의 대상 계좌를 즉시 정지할 수 있기에 피해 확산을 조기에 차단하는 대응력 있는 사회 안전망을 만드는 핵심 기반이다.


셋째, AI 피싱·딥보이스 사기 대응 전담부서를 금융당국 내에 설치하고, 기술개발과 형사처벌 조항을 동시에 보완하는 ‘보이스피싱 특례법’을 신속히 제정해야 한다. 이 법은 음성합성, 문자 링크, 악성 앱 유포 방식 등을 행위 유형별로 정밀하게 규정하고, 처벌 수위를 강화함으로써 보이스피싱 범죄를 기획단계부터 차단할 수 있다.


보이스피싱은 어느 날 갑자기 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국가가 만들어 놓은 방치의 틈을 타고 들어온 것일 수 있다. 기술의 사각지대, 법의 공백, 정책의 분절이 만들어낸 틈이다. 그렇기에 지금 필요한 것은 모든 틈을 메우는 다층 대응체계, 그리고 “복지는 범죄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할 때 완성된다”는 국가 철학이다.

국가가 국민의 삶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사람이 사람을 의심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글/사진: 김한준 박사 【비전홀딩스 원장, Life-Plan전문가, 칼럼니스트】 경영·교육·생애설계 분야 명강사. 공공기관 책임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인생 후반기 생애설계 리더십과 미래사회 전략을 주제로 명강의를 이어가고 있다.(기사제보 charly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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