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속지 말고 맞서라
며칠 전, 필자의 지인이 보이스피싱에 속아 수천만 원을 송금한 일이 있었다. 그는 평범한 직장인이었고, 평소에도 “나는 그런 데 절대 안 속는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어느 날, “고객님의 통장이 범죄에 사용 중이다”라는 경찰 사칭 전화를 받았고, 곧이어 금융기관 직원을 사칭한 또 다른 전화가 연결되었다. “은행 서버에 악성코드가 감염돼 자금이 위험하니 안전계좌로 옮겨야 한다”라는 설명에 급히 보험 약관대출을 실행하고 송금했다. 이상함을 느끼고 뒤늦게 지급정지를 요청했으나, 대부분의 자금은 이미 인출된 상태였다. 그는 이후 심리적 충격으로 병가를 내야 했고, 가족과의 관계에도 큰 상처를 입었다.
보이스피싱은 이제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정서적 영역까지 침투한 심리 공략형 범죄이다. 최근에는 문자 메시지로 ‘카드 배송 확인’이나 ‘택배 조회’ 링크를 보내 악성 앱 설치를 유도하는 방식이 일반화되었으며, AI 기술을 이용해 가족의 목소리를 정교하게 합성한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엄마, 나야. 사고가 났어”라는 목소리에 속아 수백만 원을 송금한 사례도 빈번히 보도되고 있다.
2024년 기준, 국내 보이스피싱 피해금액은 6,303억 원으로 집계되었으며, 이는 전년 대비 약 12.3% 증가한 수치다. 특히 기존에는 60대 이상 고령층이 주요 피해층이었으나, 최근에는 20~30대의 피해 비율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같은 해 금융감독원 통계에 따르면 2030 세대의 피해 비중은 전년 대비 9.8% 포인트 상승하였다.
이러한 피해는 단순한 금전 손실을 넘어 정신적·사회적 후유증으로 확산된다. 피해자들은 죄책감과 수치심에 시달리고, 고령층의 경우 정신적 충격으로 불면증과 우울증을 겪는다. 가족 간 신뢰가 무너지고, 금융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디지털 전환에 대한 거부감까지 더해지며 사회적 비용이 누적된다.
이러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개인과 사회 모두의 대응이 필요하다. 먼저, 출처가 불분명한 전화는 반드시 끊어야 한다. 경찰, 검찰, 금융기관은 전화로 송금을 요구하지 않는다. 또한 문자 속 링크는 클릭하지 않아야 하며, 금융기관과의 연락은 반드시 공식 애플리케이션이나 대표번호를 통해 직접 확인해야 한다. 금융 앱에는 ‘보이스피싱 신고’ 기능이 대부분 마련되어 있다.
만약 송금을 이미 한 경우라면 30분 이내의 조치가 중요하다. 즉시 112에 신고해 지급정지를 요청하고, 해당 금융기관에 ‘피해계좌 지정제도’를 신청하면 상대 계좌에서의 인출을 차단할 수 있다. 그러나 현행 실시간 이체 시스템은 자금 인출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피해 회복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금융 시스템 전반의 구조적 보완이 필요하다. 이상거래 탐지를 위한 AI 기반 분석 체계를 고도화하고, 고액 송금이나 다계좌 거래 시 입출금 이중 인증 절차를 도입해야 한다. 아울러 ‘전기통신금융사기특별법’에는 AI 음성합성, 위장 앱 설치 등 최신 범죄 수법에 대응할 특례 조항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해외에서는 이러한 제도 개선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 일본 금융청은 2023년부터 ‘이상 계좌 실시간 감지 시스템’을 도입하고, 금융기관 간의 정보 공유를 의무화해 피해 건수는 전년 대비 약 15% 감소, 피해금액도 12% 이상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 FTC)는 피해 접수 시 계좌를 즉시 일시 정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운영 중이며, 보이스피싱 차단 앱(Nomorobo) 지원과 AI 음성 사기 대응 공모도 병행해 음성 기반 피싱 사례가 뚜렷이 줄고 있다.
『명심보감』에 실린 “의심이 있어야 생명이 있고, 경계가 있어야 재물이 보전된다”는 구절은 단순히 경계심을 강조하는 수준을 넘어, 생존과 자기 보존의 기본 덕목을 설파한다. 디지털 범죄 환경 속에서 이 문장은 더욱 현실적이다. 정보의 흐름이 빠르고 위장된 신뢰가 곳곳에 깔린 사회에서, 의심은 지혜의 시작이자 생존의 기술이다.
‘경계’는 무관심이 아니다. 그것은 성찰이며, 타인을 시험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계선을 명확히 하려는 지혜다. 디지털 시대의 보안은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경계하는 태도와 확인하는 습관이 개인 방어선의 시작이다.
기억하라. 그 전화는 우연히 걸려온 것이 아니다.
당신을 정교하게 겨냥한, 디지털 범죄의 손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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