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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준 Mar 26. 2022

양들은 아직 비명 지르고 있다.

<양들의 침묵> - 조나단 드미

 <양들의 침묵>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여자 FBI 요원이 연쇄 살인범을 잡기 위해 심리학 박사이자, 식인 살인으로 갇혀있는 한니발 렉터에게 도움을 받아 범인을 잡고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이야기다. 영화사 역사에 길이 남을 매력적인 빌런인 ‘한니발 렉터’를 탄생시키고, 스릴러 장르 명작 영화로 남은 <양들의 침묵>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양들의 침묵>에서 중점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부분은 ‘캐릭터’다. 똑같이 연쇄 살인범을 잡는 영화인 <세븐>처럼 기발한 사건으로 이루어진 촘촘한 플롯 구성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명작으로 남은 이유는 캐릭터를 구성하는 연출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인공 ‘클라리스’는 잠시 뒤로 미뤄두고, ‘한니발 렉터’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다. 

‘한니발 렉터’. 영화의 118분 러닝타임에 단 15분 등장하지만, 사실 영화를 보고 나면 머릿속에 남는 것은 렉터 뿐일 것이다. 어떻게 이런 매력적인 캐릭터가 탄생했는지, 그 이유는 크게 화면 연출의 측면, 캐릭터가 가진 성격의 측면. 2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화면 연출의 측면에서 이야기해보겠다.


 <양들의 침묵>에서 가장 중요한 연출을 꼽으라면 ‘정면 클로즈업 샷’이다. 인물을 표현할 때 정면 클로즈업 샷은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표현의 효과를 극대화 시킨다. 이 샷이 효과를 주는 대상은 주변 인물, 한니발 렉터, 클라리스로 나눌 수 있다. 주변 인물을 정면 클로즈업으로 잡을 때는, 항상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감독의 의도가 들어가있다. 영화의 초반 부분, 클라리스가 연쇄 살인범 ‘버팔로 빌’을 잡기 위해 교도소로 찾아갔을 때, 그를 만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나는 인물은 교도관 바니다. 이때, 바니는 정면 클로즈업으로 화면에 잡히는데, 이는 감독의 의도가 다분히 들어가 있는 장면이다. 감독은 관객이 그저 방관자로써 영화를 감상하길 원치 않았다. 직접 참여하여 참여자로서 렉터의 공포를 느끼길 바랐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이 정면샷이다. 바니가 정면으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클라리스에게 렉터에 대해 경고하는 모습은 마치 관객에게 하는 말처럼 보인다. 어찌보면 바니는 제 4의 벽을 잠시 넘은 것이다. 관객은 이 지점부터 영화의 참여자로서 클라리스와 함께 공포에 떨게된다. 비슷한 기능을 하는 장면은 영화의 후반 버팔로 빌과 클라리스가 마주하기전, 클라리스의 친구를 만나는 장면이다. 친구는 정면 클로즈업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관객의 참여를 다시 한번 유도한다.

  정면 클로즈업샷은 렉터의 위압감을 보여주는데에도 효과적으로 쓰인다. 클라리스가 렉터를 만나는 장면에는 항상 렉터의 정면 클로즈업이 쓰이는데, 이때 렉터의 강렬한 눈빛은 마치 관객의 마음을 꽤뚫어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에서 인물이 화면을 차지하는 크기는 그 인물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메타포로 활용된다. 클로즈업으로 렉터의 얼굴을 잡으면 그의 얼굴은 헤드룸 없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앞서 말했던 눈빛이 위치한다. 관객은 큰 화면으로 보면 볼수록 렉터에게 움츠려들 수 밖에 없다. 반면, 클라리스는 클로즈업으로 잡히더라도 헤드룸을 가지고 있어 그 공간 차지는 상대적으로 적어보인다. 힘의 상하 관계가 프레임 속 공간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클라리스에게 정면 클로즈업이 쓰였을 때는 렉터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다. 일단 앞서 말했듯 헤드룸을 가지고 있어, 화면에 얼굴이 꽉 차지 않아 관객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 또, 그녀의 눈빛은 렉터나 주변 인물과는 달리 살짝 카메라를 벗어나 있어 관객이 느끼는 부담이 덜 하다. 클라리스에게 사용된 클로즈업은 관객이 그녀의 마음에 공감하길 유도한다. 사실, 클로즈업은 배우의 표정 연기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샷이다. 클라리스는 렉터와의 대화에서 느끼는 당혹감, 살인마의 실마리를 잡은 쾌감을 그 표정으로 표현하고, 정면 클로즈업은 그 감정을 주인공과 공유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앵글을 통해서도 렉터의 힘은 드러난다. 관객과 감정을 공유하는 클라리스와 렉터가 만나 대화할 때 렉터는 주로 로우앵글로, 클라리스는 주로 하이앵글로 화면에 잡힌다.

사실 이 둘이 대화할 때 앵글은 그 상대 인물의 POV다. 즉, 클라리스는 앉아있는 반면에 렉터는 서 있다. 이는 자연스러운 앵글의 차이를 이끌어내고 그에 따른 효과를 전달 할 수 있도록 한다. 로우앵글로 잡힌 렉터는 그 무게감이 중후하고, 위협적인 인물의 도상으로 존재하게 된다. 하이앵글로 잡힌 클라리스는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수동적인 인물로 보인다. 


 화면 구성물, 즉 미쟝센도 관객이 위협을 느끼도록 설계되었다. 렉터를 만나러 클라리스가 교도소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클라리스는 교도소장을 따라 길고 긴 복도를 지나간다. 그리고 그 클라리스의 어깨 너머로 철창이 하나 둘 닫힌다. 이 여러개의 철창은 렉터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암시하기도 하지만, 관객과 렉터를 밀폐된 공간에 가두는 역할을 한다. 렉터를 만나기 전 마지막 철창이 클라리스의 뒤로 닫혔을 때, 관객은 비로소 이 공간에는 렉터와 흉악범들, 관객과 클라리스만 남았다는 걸 깨닫는다. 이 폐쇄된 느낌은 관객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클라리스와 렉터가 만난 장면에서, 렉터가 갇힌 곳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렉터는 독방 복도의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창살이 아니라 강화유리로 갇혀있다. 이는 렉터가 다른 범죄자와는 다른 비범한 인물임을 나타내고, 그 유리의 투명함은 마치 당장이라도 렉터가 우리의 주인공 클라리스를 해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말 그대로 화면상에서 그는 갇혀있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명도 그에게 특별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먼저 클라리스와 렉터의 첫 만남 바로 직전, 클라리스와 교도소장이 대화할 때 화면은 붉은색의 조명이 지배한다. 기호학적으로 붉은색은 죽음,피,경고등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 붉은 조명은 앞서 말했던 주변 인물의 정면샷과 상호호완 관계를 맺으며 관객에게 경고하는 역할을 해낸다. 관객은 이전의 분위기와 사뭇 다름을 느끼며 렉터와의 첫 대면을 긴장하게 된다.

렉터를 비추는 키 조명은 항상 위에 위치한다. 인물의 위에 위치한 이 조명은 렉터의 얼굴에 강한 그림자를 지게 만든다. 이 강한 콘트라스트는 인물에게 섬뜩한 얼굴을 선물해, 렉터를 연기한 안소니 홉킨스의 맹렬한 표정 연기를 더욱 강화시킨다.

 이제, 연출적인 부분을 넘어서 ‘한니발 렉터’ 그 캐릭터성에 관해 이야기 하겠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렉터는 인륜을 저버린 흉악무도한 연쇄 살인범이다. 사실 영화를 보지 않고 그 캐릭터에 대한 설명만 들었을 때는 그 누구도 이 캐릭터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영화에서 이 캐릭터의 어떤 특성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아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었을까. 일단, 가장 먼저 찾을 수 있는 것은 그 젠틀함이다. 관객은 영화를 보며 주인공을 응원하고 은연중에 자신과 동일시 하기도 한다. 렉터는 그 주인공인 클라리스에게 항상 젠틀하고 차분하게 대한다. 이 지점에서 일단 관객은 렉터에 대해 생각해볼 가치를 가지게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연쇄 살인마를 잡기 위해 FBI요원이 더 흉악한 연쇄 살인마를 멘토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대게, 영화에서 주인공의 멘토는 주인공을 성장시키는 초자아의 역할을 해낸다. 그렇기에 관객은 자동적으로 멘토에게 호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데, 그 멘토가 살인마라니. 이 이상한 아이러니에 관객은 혼란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렉터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호감은 매력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 개성이 중요한데, 난 그 개성이 렉터가 ‘안티 히어로’의 성향을 갖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가 히어로라는 뜻은 아니다. 그 ‘성향’이 있다는 것인데, 렉터가 영화속에서 행하는 모든 일은 주인공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에게 이득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에 관객은 주인공의 이득 = 공익으로 보고, 성희롱을 한 죄수를 응징하는 렉터의 모습과 클라리스를 억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찰을 죽이는 모습에서 렉터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심지어 그는 그저 일차원적으로 살육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식인이라는 행위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한다. 관객은 법을 어기며 공익을 추구하는 여타 안티히어로에게 느끼는 매력을 렉터에게 느끼게된다. 렉터는 그에 부응하듯 관객의 이드, 원초적 욕망을 잔인한 수법으로 충족시켜준다. 이것이 그가 죄에 부응하는 벌을 받지 않았음에도 비호감을 사지 않는 이유다.     


 앞에 한니발 렉터라는 캐릭터에 대해 많이 이야기 했지만, 사실 영화의 메시지는 렉터보다 우리의 주인공인 ‘클라리스’와 메인 빌런 ‘버팔로 빌’의 서사로 나타난다. 클라리스와 빌은 양 극단에 서있는 인물이다. 정의를 집행하는 영웅의 도상인 FBI 요원과 연쇄 살인을 일삼는 사이코패스 살인마. 겉으로 보기에는 둘 사이에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둘은 근본적으로 같은 문제에 당면해 있다. 클라리스는 어린 시절 경찰서장인 아버지가 죽고나서 양과 말을 키우는 삼촌의 목장으로 가게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태어나지 얼마 되지 않은 양들을 도살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클라리스는 이때 비명 지르는 양들을 한 마리도 살리지 못한 것에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이 기억은 그녀의 기억속에 트라우마로 자리잡아있다. 빌은 어린시절 학대를 당해 사랑을 갈구하며 성전환 수술을 희망하지만 그 어떤 병원도 그를 받아주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과 그로 인한 무관심, 가정폭력으로 인한 변화에 무관심한 사회의 반응. 둘은 즉, ‘사회적 폭력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사회적 폭력이 낳은 트라우마는 클라리스를 죄책감에 시달리는 FBI요원으로 만들었고, 빌을 연쇄 살인마로 만들었다. 클라리스가 빌을 죽이는 장면은 피상적으로는 권선징악으로 보이지만, 그 본질에는 같은 피해자끼리 서로를 죽이는 상황이 만들어진 아이러니한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회적 폭력과 그 희생자들.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라고 생각한다. 클라리스가 성장해서는 그 사회적 폭력이 줄어들었나? 아니다. 클라리스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은근히 무시받고 소외된다. 덩치 큰 경관에게 둘러쌓인 클라리스의 모습을 감독이 이유 없이 넣은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클라리스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권선징악을 행한다는 데에서 여성 서사라고 볼 수도 있겠다.    

 클라리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폭력은 검거에 흉악한 살인마 렉터의 도움을 받도록 만들었고, 빌을 파멸의 길로 이끌었다. 위에 말했듯 클라리스가 빌를 죽이는 장면의 본질이 아이러니라면, 과연 빌을 죽였다고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는 곧 영화의 제목과 렉터의 대사로 이어진다. 영화의 제목은 ‘양들의 침묵’이다. 양은 ‘순결함’, ‘순수함’을 상징하고, 클라리스는 어릴적 어린 양들이 도살 당할 때의 비명이 트라우마다. 무고한 희생자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클라리스는 빌을 잡아 희생자가 더 나오지 않도록 막으면 죄책감이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빌 또한 사회적 폭력의 무고한 희생자였고 클라리스는 그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했다. 렉터는 영화의 끝부분 클라리스에게 묻는다. ‘양들의 비명은 멈췄나?’ 클라리스는 대답하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사회적 폭력의 희생양들의 비극을 본 것이다. ‘침묵’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에 대해 그 일을 밝히거나 드러내지 않음’이다. ‘어떤 일’이 있다는 것이다. ‘양’들의 비명은 멈추지 않았다. 즉, 사회적 폭력에 직면한 무고한 피해자들은 아직 존재한다. 이를 증명하듯 엔딩크레딧은 감옥에서 탈출한 렉터가 지나간 자리를 하염없이 비춘다. 이 평화로워 보이는 골목에도 ‘양’들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엔딩크레딧에서의 렉터는 사회적 폭력을 상징한다. 렉터가 활보하는 이 거리에는 제 2의 클라리스, 제 2의 빌이 탄생할 것이다. 

양들의 침묵을 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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