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그리고 브리즈번
"봄은 늘 거기에 머물러 있는데, 다만 지금은 겨울일 뿐이다."
- 자전거 여행, 김훈 -
봄을 찾아 먼 곳 까지 날아왔다. 따뜻한 남쪽나라의 소식을 듣고 힘찬 날개짓으로. 그리고 만난 호주 브리즈번의 봄. 좁은 틈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새생명의 온기가 도시를 앙증맞게 비춘다. 곳곳에선 벌써 햇살에 분홍빛으로 탄 얼굴의 사람들이 박자를 맞춘듯 경쾌하게 걷는다.
나는 동물들을 좋아한다. 소셜 네트워크의 알고리즘에는 언제나 다양한 동물 사진이 빼곡하게 띄워져 있을 정도. 그렇기 때문에 내게 브리즈번은 보물창고와 같다. 바로 이 곳에 세계최대 코알라 보호구역이 있으니까. 출발 일주일 전, 특별한 경험을 제대로 누리려면 하나라도 놓쳐선 안된단 책임감이 밀려왔다. 덕분에 입장티켓부터 시작해 어떤 프로그램이 있는지도 차곡차곡 확인한 후, 가는길도 미리 다 섭렵해두었다.
왜인지 더 싱그럽게 느껴지는 아침,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호텔에서 버스정류장은 걸어서 약 5분거리. 게다가 요즘은 버스가 언제 도착하는지도 분단위로 알수 있기에 딱 시간을 맞춰 나섰다. 바닥은 낮고 천장은 높은 버스의 앞문이 두둥실 열리고 별 생각없이 올라타서는 짐짓 놀란다. 열명 조금 넘는 버스의 승객 중 너다섯명이 한국인인 광경. 이곳은 한국인가 호주인가?
동공의 지진을 거두고 자리로 앉아서 다시 한번 내려야하는 정류장과 가는 길을 확인하는데, 뒤에서 대화하는 한국인 커플의 말소리에 괜히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내가 예전에 워홀(워킹 홀리데이) 왔을 때만해도 저 식당은 없었거든. 많이 바뀌었네." 가는 길따라 생겼다 없어진 가게의 역사를 읊어주는데, 꽤 흥미롭다. 창가에 머리를 사뿐히 기대어 바뀌는 장면들을 한참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덧 코알라 보호구역이다. 안내방송이나 표지판은 사실 볼 필요도 없다. 한국인이 모두 내리는걸 보니 잘 도착한게 분명하다. 또다시 일렁이는 묘한 동질감.
'론 파인 코알라 보호구역'은 코알라 뿐만 아니라 왈라비부터 캥거루, 웜뱃, 딩고, 오리너구리까지 다양한 동물들을 보호하고 있다. 게다가 공원처럼 나무와 풀들을 잘 가꾸어둬서 편하게 산책 온 느낌이 든다. 이 느낌, 정말 애정하는 느낌이다. 혼자서 설렁설렁 걷더라도 두시간내로 다 둘러볼 정도로 부담이 없고, 무엇보다 귀여운 코알라들이 유칼립투스잎을 야금야금 먹고 있는 걸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물멍, 불멍에 이어 코알라멍 때리기 딱이다.
공원 안으로 조금만 더 걸으면 캥거루와 왈라비에게 직접 먹이를 줄 수있는 초원이 있다. 울타리도 없고 담도 없이 사람과 동물이 한데 어우러진다. 슥 둘러 보다 구석 진 나무 아래 혼자 쉬고 있는 캥거루를 발견. 세번째로 느끼는 동질감에 나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선다. 입구에서 받아온 먹이를 건내니 몇번 입을 갖다대다 고개를 홱 돌리는 녀석. 그래, 얼마나 관광객들한테서 벗어나고 싶을까 싶어 퍼뜩 일어나 멀찍이 걸었다. 차암 날씨도 좋고, 공기도 좋고. 이러니 많은 한국인들이 찾을 수 밖에. 며칠 전까지만해도 완전히 가을이라며 친구와 메세지로 궁상을 주고 받았는데, 새카맣게, 아니 샛노랗게 잊고는 봄햇살에 안겨본다.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코 밑을 스쳐가는 계절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두 눈으로 세상을 환영하고 오랫도록 마음에 담아 둘 수 있음에 벅차다. 이러니 서러운 겨울에도 잎싹을 꿈 꿀 수 있는 거겠지. 이제 막 봄이 깨어난 브리즈번, 이 곳에 새 생명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