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에서 당신의 선택은?
"늘 다니던 길에서 비켜나 걸어 보고, 평소에 듣지 않던 다른 음악을 유심히 들어보고, 낯선 사람들과 차를 마시는 땀나는 모험을 감행해 보자. 스케줄에 없던 약간 낯선 일상의 시도를 통해 삶의 의외성과 마주치게 되면 다른 감흥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 그대, 느려도 좋다, 이규현 -
날짜와 요일이 무색한 직업. 때로는 하루가 48시간으로 늘어나기도 하는 일. 지구 반대편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다반사. 자꾸 달라지는 날씨와 계절을 체크하는게 버릇이 되어버린 삶. 나의 라이프 스타일을 읊자면 대충 이 정도 같다. 워낙 변화구가 잦은 일상이라 그런지 이 속에서 어떻게든 익숙한 나의 레퍼토리를 만들려고 애썼다. 내가 꽉 쥘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가보다. 아무도 바꿔놓을 수 없는. 그러다보니 장소와 시간은 달라지더라도 나 홀로 보내는 시간은 어떻게든 지키려 고집했다. 어느 나라를 가던 왠만하면 혼자 먹고 마시며 걸었고, 멀찍이 떨어진 나그네로서의 모습을 즐겼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새벽 2시에 출발해 아침 7시가 넘어 도착한 이탈리아 밀라노 비행. 천근만근이 된 몸을 겨우 가눠 호텔 조식으로 배를 채운 후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비가 한두방울씩 떨어지는게 커다란 통유리 창 너머로 보인다. 현재 시간 아침 9시 반. 잠시 눈을 붙였다 두오모 성당 부근을 둘러보고 근처에서 끝내주는 화덕피자로 저녁을 먹자며 중얼댄다. 그러고 몇 분 지났을까. 호텔방 전화기가 때르릉 때르릉 울렸다. 무슨 일이지? 침대에서 휘적하고 일어나 전화기에 손을 댄채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한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다. 함께 비행한 동료 승무원이 방으로 전화를 걸어 같이 나가자고 하는 경우다. 왠지 쎄한 촉이 번뜩이는 순간.
비행에서 오늘 처음 만난 동료와 쿵짝이 잘맞기란 쉽지 않다. 설령 그렇다 한들 함께 나가 시간을 보내며 친구처럼 어울리는 건 더욱 어려울테고 말이다. 전화벨이 서너번 울리는 그 짧은 몇 초사이 머리 속 프로펠러가 왱왱 돌아간다. 결국 수화기를 들었다. "Hey, Julia! Let's go out together. We're waiting for you at the lobby now."(줄리아! 같이 나가자. 우리 지금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어.) 아니, 그 전에 간다는 말도 안했는데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게다가 우리라면 몇 명인거야? 마음 속에서 질문들이 마구 역류하려 했지만 최대한 어르고 달랜다. 그러다보니 무의식적으로 알겠다는 한마디만 던진 채 전화기를 내려놓아 버렸다. 뒤늦게 나를 붙잡는 걱정들. '여행 내내 너무 시끄러우면 어쩌지, 취향이 달라 식당을 고르는게 어려울 수 있어. 다들 가고 싶은 곳이 다를 수도 있는데 복잡해지네.' 방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비행생활 처음인 단체 외출에 조마조마한 마음이다.
그 때 문득 떠올랐던 한 구절. '할까 말까 할 때는 하라.' 그래, 이 것도 또 하나의 재밌는 경험이 되겠지. 너무 지레 판단하지 말자고 마음을 삼켜낸다. 로비에 도착하니 손을 흔들고 있는 세명의 동료. 나까지 총 네 사람이다. 자, 여기서 결론부터 먼저 말하겠다. 밀라노는 나에게 정말 신나고 흥미로운 도시로 기억에 남게 되었다. 역시 새로움에 한발짝 가까이 나아갔을 때 얻게되는 색다름이 있다. 물론 혼자였어도 좋았을게 분명하지만 지금은 이 신선함을 환영하기로 한다. 콜롬비아, 태국, 필리핀에서 온 가지각색의 친구들은 서로를 배려해주려 애쓰는 모습을 내내 보여주었다. 오히려 그렇다보니 내가 계획하고 가려고했고 먹으려했던 것들을 모두, 오히려 유쾌한 분위기로 다 해냈다. 뿐만 아니라 곧 결혼을 앞둔 한 친구로부터 로맨틱한 이야기도 곁들일 수 있었다. 피스타치오 젤라또만큼 달달한!
다함께 외출했던 한나절이 정말 짧게 느껴진다. 그러고는 같이 안왔으면 어쩔 뻔 했을까 하는 생각이 슬쩍 고개를 내민다. 그 전에 고민하던 내 모습이 우습다. 살다보면 내 마음대로 되지않고 내가 짜놓은 길을 벗어나는 일들이 다반사다. 하지만 그 때 마음을 열고, 삶에 대한 믿음을 유지한 채 그대로 받아들여 보자. 이렇게 가벼운 것이든, 행여 가슴이 너무 무거워 주저앉게 되는 일일지라도. 그리고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뉘엿한 눈길로 관찰해보자. 생각보다 심각한 것은 없고 예상만큼 나쁜 것도 없이, 다만 나의 계획과 달랐을 뿐이란 걸 알게 될 때 살풋 웃음이 난다. 그러다보면 낯섬에도 양 팔을 내어주게 된다. 오늘이 끝없이 새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