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하다. 굿바이.
김광석은 법정스님으로부터 '원음'이라는 법명을 얻었는데, 둥그런 소리로 사람들의 애환과 고뇌를 달래주고 품어 안으라는 뜻일 거다.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가 이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우선 가사를 보자.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 주던 때
막내아들 대학 시험 뜬눈으로 지내던 밤들
큰딸 아이 결혼식 날 흘리던 눈물 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라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 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이 노래를 김광식(김광석이 아니라 철학자 김광식이다)이 철학으로 푼다. 넥타이는 절제와 질서를 상징하며 통제와 구속에 연결된다. 이 노래에서 김광석은 '넥타이 철학'을 말한다.
헤겔의 '자유 철학'은 김광석의 '넥타이 철학'의 근거를 제공한다.
헤겔은 자유롭게 살아야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나를 위해 사는 것이다. 문제는 나를 위한 삶이 공동체를 위한 삶이 될 수 있는가다. 모두가 자유를 추구하면, 어느 누구도 자유롭게 살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자유를 확장해 나간 과정이다. 왕정에서는 한 사람만이 자유롭고, 귀족정에서는 몇몇 사람만이 자유롭다. 하지만 민주정에서는 모두가 자유롭다. 모두가 자유로운 공동체를 이룰 때, 개인의 자유 추구는 곧 공동체의 자유 추구가 될 수 있다. 즉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공동체가 실현되면, 개인의 행복이 공동체의 행복과 합치된다. 이것이 헤겔의 주장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엄마는 늘 자신은 뒷전이고 가족들을 위해 희생해 왔다. 엄마도 한때는 꿈과 낭만이 있던 여인이었음을, 즉 자유로운 존재였음을 우리는 외면해 왔다. 엄마는 애잔하지만, 우리는 나쁜 사람이다.
세상은 늘 불공평하다. 누구는 평생 희생하고, 다른 누구는 누구의 희생 덕분에 자유롭게 산다. 그런데 정말 누구가 자유롭게 살까? 헤겔은 아니라고 말한다. 빚지고 사는 삶은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빚지지 않은 자유라야 행복할 수 있다. 서로 빚지지 않은 공동체가 이상적인 공동체다.
홀로 먼 길을 떠나는 여인은 아무 말이 없다. 남편은 무지하여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왜 한마디 말이 없냐며 흐느낀다. 하지만 아내는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남편은 듣지 못하고 있다.
그녀가 남긴 말은 단 한 마디,
굿바이!
지긋지긋하고 후련하다는 뜻이다.
지금부터는 내 생각이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줄곧 공감하며 듣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폭소를 터뜨렸다.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라는 마무리 가사가 어색했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로 끝내는 것이 좋았다. 그러면 슬픔의 정서가 더 지속되고, 여운이 남는 노래가 됐을 것이다. 그런데 죽은 아내를 향해서 남편이 잘 가라고 하며 노래가 끝난다. 네가 나를 떠났으니 나는 새 여자를 찾아보겠다는 말로도 들릴 수 있다. 내가 이상한 건가?
김광식은 이 노래를 '넥타이 철학'이라고 했는데, 주체와 객체 관계가 혼란스럽다. 즉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사람은 남편이니, 구속당하는 사람은 아내가 아니라 남편이다. 그러나 김광식은 넥타이의 구속을 아내에게 관련짓고 있다. 키워드를 잘못 고른 것 같다. '뜬눈'이나 '눈물'은 어땠을까? 그러면 이 노래의 철학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무튼 이 노래는 우리에게 아내보다는 엄마를 더 생각하게 한다. 엄마는 가족들 모두가 자유롭게 살라고 자신을 희생한다. 남편이 죽은 아내를 추억하면서 느끼는 감정도 엄마로서의 아내에게 향해 있는 것 같다. 막내아들 대학시험, 큰딸 아이 결혼식 등의 노랫말에서 그런 것을 느낀다.
어머니! 세상에서 이보다 더 아름답고 더 애잔하고 더 숭고하고 더 미안한 말은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하나의 낱말이 아니라 문장이다. 이 문장 속에는 많은 뜻이 들어있다. 어머니! 우리를 용서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