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정 Nov 08. 2024

외면하고 싶었던 침잠의 세계

경찰차 보내줄게 그거 타고 와.

‘집사님, 집사님은 너무 에너지를 밖으로 쏟으려 해요. 에너지를 안으로 쏟아보는 게 어때요? 그게 조금 필요해 보여요.’ 심리학 공부를 하신 권사님의 한마디. 그 한마디가 나를 침잠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선) 이번 주는 좀 어떠셨어요?

(나) 늪에 빠진 기분이에요. 힘들었어요. 선생님 앞에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심리학 공부하신 권사님께서 제게 그러시더라고요. 예전의 나를 마주하여 안아주고 위로해 주고 하는 게 어떻겠냐고요.     


(선) 그러면 오늘은 그 작업을 좀 해볼까요?

(나)…네…


(선)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혹시 있을까요?

(나) 있어요. 학교 폭력 당시 부모님의 반응이요.     


(선) 무슨 일이었는지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어요?

(나) 네, 전 집에서는 말도 웃음도 없지만 부모님이 안 계시는 그곳에서는 늘 활기차고 장난기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걸 좋아했고요. 사건의 발단은 별거 아니었어요. 친구들끼리 롯데월드를 가기로 약속을 했고 못 가면 3만 원씩 주자고 약속했어요.     


(선) 몇 살 때요?

(나) 중 2 때요. 사실 그 약속을 했지만, 자신은 없었어요. 안 그래도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걸 싫어하는 부모님이기에 제가 친구들과 놀러 서울에 간다고 하면 허락하실까 싶었어요. 그러면서도 저는 친구들과 놀러 가고 싶었죠. 제게 친구란 존재는 휴식처이면서 도피처였으니까요. 친구들과 놀러 가기로 한 날과 가족여행 겹치게 되었는데 그냥 가족여행을 선택했어요. 나르시시스트이면서 가부장적인 아버지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정에서 제 의견은 불필요했으니까요. 그냥 따랐어요. 가족여행을 선택한 저를 친구들이 이해해 줄 거라 믿었죠. 그런데 그 친구들은 제게 등을 돌렸어요.  

   

(선) 그랬구나. 그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또 다른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아니고요?

(나) 네, 그때부터 시작이었어요. 특별하게 제 신체를 괴롭힌다거나 반 아이들에게 저를 따돌리라 한다거나 그런 부류의 괴롭힘은 아니었어요. 그냥 저희끼리의 은근한 무시와 괴롭힘이었어요. 그런데 아시잖아요. 여자 친구들은 보통 끼리끼리 무리를 형성해서 노는 것. 그 무리에서 따돌림당한 제가 어느 그룹에 다시 끼어서 놀 수 있었겠어요. 한 학기 동안 거의 저 혼자였어요.     


(선) 힘들었겠다.

(나) 그렇죠, 민감할 사춘기 시절에 반 아이들 앞에서 창피했어요. 그리고 전 그 당시 누군가의 도움이 정말 절실했었는데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다는 게 힘들었어요.     


(선) 그랬겠네요. 아버지는 미정 씨 말대로 생물학적 아버지였고. 엄마는요? 어머니에게 말했어도 되었잖아요.

(나) 그건 쉽지 않았어요. 사춘기 접어들면서 엄마와도 사이가 좀 데면데면했어요. 중학교도 제 마음대로 간 학교라 그것도 마음에 안 들어하셨고 무엇보다 제가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예전부터 탐탁지 않아 하는 엄마였기에 더 말을 못 했는지도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말을 못 했는지도 모르겠고요.


(선) 어디에 말할 곳도 없고 정말 힘들었겠네, 미정 씨가.

(나) 네, 그렇죠. 그런데 진짜 사건은 방학 때 일어났어요. 사실 그전에는 은근한 따돌림만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몇 달이 지나서 방학 때 갑자기 돈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선) 돈? 무슨 돈이요?

(나) 놀이동산 안 가는 사람이 돈 주기로 한 약속이요. 그래서 저는 부모님께 방학 긴급 소집일이라 거짓말을 하고 제 통장을 들고 그 아이들을 만나러 버스 타고 1시간 정도 갔어요. 그냥 이 돈을 주고 그 친구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었거든요. 갑자기 이렇게 괴롭히지 말고 이 돈이나 먹고 떨어져라? 하는 그런 마음에서요. 그런데 돈을 줄 수가 없었어요.     


(선) 아이고, 걔네 진짜 나빴네요.

(나) 모르겠어요, 그냥 그 시기에 있는 치기 어린 장난 그쯤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상처를 안 받았다면 그건 거짓말이지만 그 아이들이 준 상처보다도 부모에게 받은 상처가 커서 별로 크게 와닿지 않는달까? 아무튼요. 저는 돈을 찾으려면 비밀번호를 눌러야 한다는 사실을 중2. 그때 처음 알았어요. 돈을 넣어보기만 했지, 찾아보는 건 그날이 처음이었거든요. 비밀번호를 틀렸고 결국 돈을 못 줬죠. 네 통장 비밀번호를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부모님께 전화하라며 닦달했고 전 결국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엄마한테 와서 돈을 주라고 하라고 했거든요.     


(선) 그래서요? 엄마의 반응은요?

(나) 놀라셨죠. 긴급 소집일이라고 학교 간 애가 다짜고짜 와서 돈을 좀 친구들한테 주라고 하니까요. 그런데 안 오셨어요. 못 오신 건가? 그날 사촌 언니가 결혼할 사람을 할머니, 할아버지께 보여드린다고 온 가족이 우리 집에 모인 날이었거든요. 한숨을 쉬시더니 경찰차를 보내줄 테니 그걸 타고 그 아이들과 집으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선)…. 속상했겠네요? 미정 씨는 엄마의 어떤 반응을 바랐어요?

(나) 저는 그냥 엄마가 와서 이 일을 해결해 주기를 바랐어요.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엄마한테 눈에 경찰차를 보내주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을지도요. 친척들이 모였으니 집안일하느라 나오기 쉽지 않았을 테고 그러니 경찰인 아빠에게 말해서 경찰차를 보내는 게 엄마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을지도요.     


(선) 그래서 경찰차를 타고 갔나요?

(나) 아니요. 경찰차를 탄다는 게 거북스러웠어요. 보호받는 느낌이 들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들은 어땠겠어요. 자신도 알 거 아니에요.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한다는 것을요. 되려 우리가 그걸 왜 타냐고 범죄자냐며 무슨 경찰차냐며 펄쩍 뛰고 난리가 났죠. 그래서 결국 버스 타고 우리 집으로 갔어요.   

  

(선) 그 친구들이랑 다 같이요?

(나) 네, 다 같이 우리 집으로요. 뭐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어요.     


(선) 그럼 그 광경을 다른 식구들도 다 봤나요?

(나) 그렇죠, 집에 들어갔는데 온 친척들이 다 쳐다보더라고요. 그 수많은 눈이 저를 쳐다보는데 수치스러웠어요. 엄마도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싸늘하게 말하고 눈초리를 하더라고요.

     

(선) 당연히 수치스럽죠, 숨기고 싶었다고 엄마가 조용히 와서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고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고 했잖아요.

(나) 네, 그냥 방에서 기다리는데 엄마가 들어왔죠. 그 와중에 또 친척들은 저희가 있는 방을 왔다 갔다 하고요. 모든 상황을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는 사실이 창피했어요. 그래도 상황은 계속 이어졌어요. 거짓말과 진실을 교묘하게 섞어가며 말하더라고요. ‘수학여행 가서 그때 저한테 돈을 빌렸어요.’ ‘저한테는 소풍 가서 3만 원 빌렸어요.’‘놀이동산 같이 가기로 약속하고 안 지키면 벌금 3만 원 내기로 했는데 준다고 약속하고 안 줬어요.’     


(선) 아 진짜, 걔네 너무 영악하다. 그래서 부모님 반응은 어땠어요?

(나) 그냥 돈을 꺼내서 주셨어요. 9만 원이요. 그리고 제게 그러셨죠. ‘엄마·아빠는 분명 너 어디 간다고 하면 돈 넉넉하게 줬던 것 같은데? 아니야? 대답해 봐’ ‘너 그런 약속을 했어? 어휴….‘ ’ 지금 여기서 너 우는데 그 눈물의 의미는 뭐야? 그건 너만 알겠지. 해결됐으니 됐다. ‘그렇게 괴롭힘도 끝이 났죠. 그런데 저는 그게 너무 상처였어요. 전 끝까지 부모님이 이 진실을 알아차려주기를 그래서 그 아이들 혼내주기를 바랐어요. 그런데 그날 이후 엄마는 어디를 가든 그렇게 말해요. ‘우리 딸들은 사춘기 없이 잘 넘어갔어. 둘째가 잠깐 친구들이랑 어울려 논다고 잠깐 속 썩인 거 외에는 그렇지 딸~?’     


(선) 아 상처다, 많이 상처받았겠어요.

(나) 네, 엄마에게 특히 배신감이 컸어요. 난 늘 엄마의 일에 누구보다 분노했는데 엄마는 정작 내 아픔에 무감했어요. 아빠야 뭐 생물학적 아버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 기대도 없었고요. 다만, 아빠는 눈치채셨을지도 몰라요. 경찰이셨고 촉은 좋으니까. 아니야, 아빠에게도 상처 안 받았다면 거짓말 같아요. 상처받았어요. 사실.     


(선) 어른들에게 상처를 받았군요. 그럼 혹시 부모님에게 사랑받은 기억은 없어요?

(나) 사랑이요? 모르겠어요. 기억이 안 나요. 저희는 4대가 살았고 농사짓는 집안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엄마는 집안일하셨고 할머니·할아버지는 농사일로 늘 바쁘셨고 아빠는 경찰이라 집에 안 계신 날이 더 많았어요. 저는 증조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그 이후에는 혼자였던 것 같아요.

     

(선) 그럼 증조할머니는 사랑을 많이 주셨나요?

(나) 글쎄요, 너무 어린 시절 이야기라 생각이 안 나요.     


(선) 4대나 산 대가족이었지만 미정 씨에겐 주 양육자가 진정한 어른이 없었네요.

(나) 맞아요, 주 양육자. 그게 없었어요. 갑자기 너무 슬퍼요.     


(선) 우리 그럼 그 시절의 미정이를 만나서 위로해 줄까요?

(나)......


(선) 아니면 지금 이 자리에서 부모님에게 큰소리로 상처받았다고 인정하고 말을 해볼까요?

(나)......


(선) 해봅시다. 해봐요. 우리.


(나) 저도 책에서 봤어요. 치유하려면 그 시절의 나를 만나서 안아주고 위로해 주라고요. 근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죠? 그냥 지난날의 상처 다 외면하고 살아가면 편한데 지금껏 그렇게 잘 살아왔는데. 이젠 너무 힘들어요. 그만하고 싶어요. 이미 상처받았고 이건 지워지지 않아요. 제 머릿속을 다 지워버리지 않는 이상 다 존재하는 일이에요.     


(선) 그래도 한 번 해봐요, 억눌렸던 미정 씨 감정 쏟아 내봐요. 네?

(나) 안 할래요. 이젠 다 포기하고 싶어요. 그냥 예전처럼 덮어두고 살아가고 싶어요.     


(선) 미정 씨, 미정 씨가 처음 상담 왔을 때 그랬죠. 결핍 속에서 아이들 키우고 싶지 않다고. 부모님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요. 우리 해봐요. 좀 더 힘내봐요.          




차치하고 싶었던 엄마에 대한 내 믿음이. 부서져 버리면서 난 ‘혼자’가 되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난 쭉 ‘혼자’였던 거다. 날 치유하려고 다닌 상담이 오늘따라 지난날을 지독하게 마주하게 하여 잔인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돌아가는 차 안,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그런 말을 내뱉었다. ‘당신들은 나에게 부모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 그리고 나도 당신들에게 자식이었던 적이 없었던 거야. 날 그냥 낳은 거였을 뿐.’ 그 시절의 외로움과 상처가 고스란히 느껴졌고 난 처음으로 큰소리로 목 놓아 울었다. 그리고 그날 비로소 깨달았다. 상담 치료는 지난날의 상처를 자꾸 마주하는 아주 고단한 작업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