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을 논하다

한 신파를 명품 스튜로 만든 '트러플'에 대하여

by 이땃쥐

모두가 아는 그 맛, 그러나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을 보고 난 감정은 복합적이었다.

한물간 복서와 서번트 증후군 피아노 천재 형제, 죽을병을 숨긴 어머니, 가정폭력의 아픈 기억까지.

솔직히 말해 영화의 플롯은 한국 영화의 성공 공식, 혹은 '신파'라 불리는

온갖 클리셰를 한데 모아놓은 종합선물세트 같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설정과 예측 가능한 전개는 마치 레시피가 정해진 밀키트처럼 느껴졌다.

분명 맛은 보장되지만, 그 이상의 감흥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우리는 이 음식이 어떤 맛을 낼지 이미 알고 있었다.


양날의 검, 익숙함이라는 함정

IKxB_QHt0K1QwcE-YQrD17eesFY.jpg
XiETbmnMiLA4MtANrGmXJ-oJJCw.jpg

이러한 '익숙한 맛'은 사실 양날의 검과 같다.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조금이라도 안일하게 접근하면 '그저 그런 양산형 신파 영화'라는 꼬리표를 달게 될 위험이 크다.

특히나 수많은 콘텐츠를 경험하며 눈이 높아진 요즘 관객들은,

영화가 의도적으로 눈물을 자아내기 위해 계산된 장치를 배치하는 순간 오히려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TfiiAVRJdG2isd398iw8MsK4tAc.jpg

<그것만이 내 세상> 역시 그 함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영화는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한 모든 공식을 충실히 따르며

스스로가 판 무덤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 보였다.

'어디 한번 울어보시지' 하는 냉소적인 관객의 예상을 단 하나도 벗어나지 못하고,

예측 가능한 감정의 궤도를 따라 흘러가다 잊혀지는 수많은 영화 중 하나가 될 운명처럼 느껴졌다.

모든 재료는 준비되었지만, 그 조합이 감동이 아닌 피로감으로 이어질 위기의 순간이었다.


예상치 못한 '블랙 트러플'의 등장

n1gvo2o6r7r30p71300k.jpg

그런데 이 영화가 절망적인 클리셰의 나열로 끝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블랙 트러플'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바로 배우 박정민의 연기였다.


%EA%B7%B8%EA%B2%83%EB%A7%8C%EC%9D%B4_%EB%82%B4%EC%84%B8%EC%83%81_%EB%B0%95%EC%A0%95%EB%AF%BC_%ED%94%BC%EC%95%84%EB%85%B8_%EC%8B%A4%EC%A0%9C%EB%A1%9C_%EC%B3%A4%EB%82%98_%281%29.JPG?type=w800

하지만 박정민의 이런 경이로운 연기가 온전히 빛날 수 있었던 데에는, 배우 이병헌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영화의 장르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병헌은 '신파'라는 장르가 요구하는 전형적인 캐릭터의 역할을 누구보다 완벽하게 수행하며

영화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었다.

박정민의 '진태'가 비현실적인 경지로 나아갈 때,

이병헌의 '조하'는 관객이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현실의 땅이 되어주었다.

그가 장르의 문법 안에서 완벽한 닻을 내려주었기에, 박정민은 안심하고 경계를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6761sjtj9s975718k8uu.jpg

그 안정적인 토대 위에서, 박정민은 '진태'라는 인물을 통해 스크린을 장악했다.

그가 보여준 것은 단순히 어눌한 말투나 독특한 걸음걸이 같은 표면적인 묘사가 아니었다.

자폐 스펙트럼의 특징인 반복적인 행동,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텐트럼(격한 감정 폭발),

그리고 본인의 의도는 아니었기에 더욱 가슴 아픈,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들까지.

그는 스펙트럼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진태'의 내면과 그로 인한 갈등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그토록 섬세한 연기였기에, 관객은 영화의 뻔한 서사를 잊고

'진태'라는 한 인간의 세계 속으로 온전히 빠져들 수 있었다.


새로운 장르의 탄생

결론적으로 <그것만이 내 세상>은 '비비고 부대찌개'를 끓이다가

최고급 블랙 트러플을 통째로 빠뜨린 것과 같은 영화다.

우리는 분명 익숙한 맛의 부대찌개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았지만,

난생처음 맛보는 '트러플 스튜'를 경험하고 나오게 된 것이다.

진부한 클리셰의 나열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영화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배우의 신들린 연기 하나가 어떻게 영화 전체의 격을 바꾸고,

관객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지를 증명해 낸 작품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서사가 배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배우가 곧 서사가 될 수 있음을 목격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