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나본, 내가 배우고 싶은 어른들
"몸이 다 성장했다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고 어른이 아니다."
갓 성인이 된 철없는 나에게 부모님께서는 항상 위와 같은 말을 강조하셨다. 덧붙여 "성인이 되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다. 책임이라..? 그때는 상당히 막연한 개념이었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친구들과 다툴 때 주먹을 사용하면 폭력죄가 성립되어 경찰서 신세를 질 수 있으니, 그런 것을 조심하라는 의미를 띠는 책임인 줄 알고 있었다. 그때는 그런 것만 잘 지키면 되는 줄 알았다.
그렇게 스물.. 스물하나.. 스물둘.. ... 나이를 서서히 먹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처음에 들었던 '책임'이라는 단어의 무게도 같이 더해져 갔다. 아무것도 모르던 새내기 시절과는 달리 학년이 올라가고 후배들이 생기기 시작하자, 조별과제 등을 수행할 때 자연스레 리더의 포지션을 맡게 되었다.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이등병 시절과는 달리 계급이 올라가고 후임들이 생기기 시작하자, 어떠한 지시를 받으면 후임들에게 알려주고, 또 후임들 중 업무에 불편함을 호소하는 인원이 없는지 살펴보는 등..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어느새 후임들을 챙기고 있었다. (물론 나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정말 놀라운 순간이다. 이때까지 개인적인 책임만 지면 되는 줄 알았던 평범한 사람이 어느새 다른 사람들을 이끌며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러한 책임이 과연 어느 날 갑자기 툭! 하고 튀어나온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이 이러한 답을 하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책임을 누군가한테 배웠다는 뜻일 텐데... 맞다! 바로 '어른들'이다. 오늘의 이야깃거리는 바로 '어른들'이다.
수년 전. 꼭 지금과 같이 차디찬 겨울이었다. 당시 나는 카투사로 복무 중이었는데, 그날 이례적으로 눈이 조금 많이 쌓였어서 아침 운동과 오전 출근을 생략했었다. 하지만 나는 당일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잠시 부대 건물로 출근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을 마친 후 숙소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건물 아래층에서 미군 중대장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혼자만 출근해서 그런가 외롭게 보였다. 가까이서 마주쳤으면 인사를 했을 텐데, 스쳐서 본 상황이라 그럴 수 없었다. 이후 숙소로 돌아가서 그날 하루를 푹 쉬었고, 일과 후 부대 내 도서관 컴퓨터를 이용하던 중 우연히 한 게시물을 보게 되었다.
핵심적인 부분만 요약하자면, 눈이 많이 오던 어느 날 한국군 병사와 미군 장교가 같이 근무를 서고 있었다. 여기서 한국군 병사가 미군에게 "왜 계급이 높은데 나와 있냐?"라고 물어보니, 미군은 눈이 오면 계급이 높은 사람들이 업무를 보는 대신 병사는 숙소에서 휴식을 취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유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계급이 높은 사람은 부대에 문제가 없는지 항상 살펴야 하는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고 했던 것 같다.
상당히 원론적인 내용이고 또 실제 같이 생활하다 보면 모든 사람이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당시 우리 부대의 중대장이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매우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중대장도 이러한 책임감이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가끔 든다.
여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앞서 얘기한 사건을 계기로 '책임'이라는 단어에 대해 조금씩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책도 가끔씩 읽어보고, 그렇지 못한 적이 훨씬 더 많았지만 후임들이 조금이라도 부대 생활에 원만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나름의 몸부림을 쳐보기도 했다. 그렇게 짧지만 길었던 군생활이 끝나고,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 내가 책임을 져야 할 날이 올까?' 안올 줄 알았다. 하지만 머지 않아서 많이 오게 되었다.
대학교 특성 상 조별과제를 많이 하다 보니까 자연스레 그러한 상황이 오게 된 것이다. 단순 조원으로 참가해 맡은 부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부터 시작해서, 조장이 되었을 때는 조원들이 힘들어하지는 않는지, 과제는 잘 완성되어 가는지, 갈등이 생기지는 않을지 등 조를 잘 이끌어가야 하는 책임감도 생기게 되었다.
나와 함께 조별과제를 했던 사람들은 알겠지만, 내가 항상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은 "모르거나 힘든 거 있으면 말하면 도와줄게." 였다. 한 친구가 자신은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고 하며 나보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며 대단해했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었는데, 사실 나는 리더의 위치에 있으면 나 자신을 더 힘들게 하는 대신에 나머지 사람들을 최대한 편안하고 걱정없게 하고자 많이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우리 부대 중대장에게 배웠던 가치이다. 물론 책 같은 것도 많이 보면서 터득한 가치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물꼬를 터준 사람은 바로 중대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감사하다. 이분 덕분에 리더의 위치에 있더라도 더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힘든 일을 도맡아하며, 진정한 어른으로서의 가치가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물론 내가 이걸로 완전한 어른이 되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아직 배울 게 한참 많다.
이후에도 어려운 영어 자료를 읽을 때에도 내 특기를 잘 살려서 동기와 후배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내가 많이 가지고 있으면,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는 마음껏 공유하고 베풀어 주는 것이 마땅한 이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말 많이 도와주었다. 결과는 동기도 후배도 모두 재수강 없이 무사히 끝낼 수 있었고, 특히 나보고 감사하다며 사례를 해줄 때에는 '정말 누를 끼치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괜히 기쁘기도 했다.
이것도 '책임'이라는 가치를 알았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중대장에게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다. 나를 한층 더 성숙한 사람에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부모님을 제외한 인생의 첫 번째 어른이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어른, 세 번째 어른, 네 번째 어른' 도 있을 것인데, 당연히 있다. 하지만 이 어른들의 얘기는 지금까지 전개해왔던 것과는 달리, 이어질 2부에서 조금 독특하고 색다른 방법으로 녹여보고자 한다.
밤이 많이 차다. 추운 겨울이지만 하루하루 잘 보내다 보면 봄은 반드시 와있을 것이다. 그렇게 두서없는 1부를 마치고 이제는 2부로 넘어가 못다한 이야기를 찬찬히 풀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