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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날만 May 07. 2016

남극의 에덴


 성격이란 이렇게도 묘사될 수 있다. 존재는 태어나자마자 모이라 여신들로부터 땅을 선물 받는다. 토양이 건조한가 눅눅한가, 구성물질은 자갈인가 모래인가처럼 기본적인 조건은 부모로부터 유전되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 그러나 그 땅이 궁극적으로 어떤 지형으로 발전하는가, 그곳에 어떤 식물이 자라고 어떤 동물이 서식할 것인가는 삶의 굴곡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건조한 사막을 타고난 인간도 충분한 사랑을 받으면 오아시스를 품을 수 있다. 반대로, 비옥한 토지를 타고나더라도 트라우마를 겪고 나면 만성적인 가뭄에 시달린다. 결국 삶이란 자신만의 동산을 가꿔나가는 일-혹은 황폐화시키는 일-에 다름 아니다.


 스스로의 정신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라. 나는 광활한 화산지대를 발견한다. 우뚝 솟은 분화구 주위는 온통 검다. 한 때 강렬했던 빛깔들의 사체 더미. 그러나 나의 산은 활화산이기에, 언젠가 외부의 충격으로 마그마가 터져나오면 내 안의 동산은 금세 다시 뻘겋게 물든다. 나의 물은 아무도 만져본 적, 맛본 적, 향 맡은 적 없는 용암이다. 용암은 역동하며 으스대지만 사실 모든 생명을 재로 뒤덮고 만다. 거짓된 생명력. 그것이 내 대지의 속성이다. 칠흑같이 잠잠하다가도 자극이 임계점에 달하면, 모든 것을 자연의 피로 쓸어버리는 불모지 말이다.


 그렇다면 네 존재의 지형은 어떤가? 어차피 자아와 타인은 서로에게 블랙박스이다. 완전한 소통이란 환상에 불과하다. 상대의 성격을 안다고 자부해봤자 오만한 확신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히, 너의 지형이 궁금하다. 처음부터 열쇠 없이 만들어진 자물쇠처럼 그렇게,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너의 내면을 들춰보고 싶다. 남몰래 관찰해온 네 손짓. 엿들은 혼잣말. 엿본 네 옷차림. 신비로운 미소 등을 근거로. 너에 대해 추측하는 것만이 나의 의미이자 의무이기 때문이다.


 너의 동산은 필시 얼어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내게 그렇게 싸늘할 수가 없다. 그 누가 사랑을 뜨겁다고 수식했는가, 나는 그 작자를 혐오한다, 왜냐하면 나를 대하는 너의 눈빛에 온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탓이다. 너를 마주하는 낮마다 나는 소름이 돋지만 밤마다 마음이 불타오른다. 아무리 애써도 손조차 잡을 수 없던 너는 어떻게, 그리 쉽게 내 영혼의 베개를 뒤흔들까? 내가 원망하는,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운 너의 남극,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추운 낙원이다. 나는 마치 나체로 빙하 한 가운데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만 같다. 나체로. 머리카락마저도 전부 깎인 채로.


 불길한 예측들이 난무한다.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누구도 성공을 점치지 않는다. 애처로운 격려만 잦다. 그럴 때마다 내 안의 심홍색용들은 분노로 꿈틀거리지만- 일리 없는 조언은 아니다. 어째서? 어째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왜? 너의 언어로 묻겠다- Warum? 너의 냉철한 지성은 나의 붉은 공상을 받아들일 수 없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극에서 폭발하는 화산을 상상한다. 빙하와 용암이 만날 때, 살을 에는 한기와 피 끓는 열기가 만날 때, 검붉은 화염이 선악과처럼 흰 땅에 열매 맺을 순간을 고대한다. 마찰의 표면에서 발생할 모든 원자들 간의 스파크를 기대한다. 피자마자 시들고 말 불꽃, 불로 얼룩져 녹아버릴 얼음을 소망한다.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동반의 파멸- 그것이 우리 사랑의 본질이다.



Cover image: Maurice de Vlaminck, The Bridge at Chatou,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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