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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준 Jun 12. 2024

박수근

나목과 사람들





박수근, 노인들의 대화, 캔버스에 유채, 1962  미시간 대학교 미술관 제공





거리에는 잎을 떨군 앙상한 나무들이 을씨년스럽게 서있다.

나무 아래에는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향하는 여인들이 있다.

골목길에는 단발머리에 검정고무신을 신은 어린 소녀가 등에 아기를 업고 서성거리고 있고, 여러 명의 아이(소녀)들이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 공기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다. 중절모에 한복을 차려입은 노인(영감)들이 둥글게 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도 보인다.

빨래터에서는 아낙네들이 수다를 떨며 빨래를 하고 있고, 시장 바닥에 좌판을 펼쳐놓고 물건을 팔고 있는 여인들이 있다.

집안에서 절구질이나 맷돌질하는 여인의 모습도 보인다

 

박수근의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어렸을 때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그런 모습이 사라진지 오래전이어서 마치 옛날 풍속을 기록한 흑백영화를 보는 것처럼 아련하다.

 

박수근 작품의 특색은 거친 마티에르(질감)이다. 마티에르는 작품의 표면에서 느껴지는 감촉을 말하는데, 그의 작품을 보면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위의 표면 같기도 하고, 제주도 곳곳에 세워진 돌하르방의 거친 표면 같기도 하며, 절에서 볼 수 있는 석탑이나 석등의 표면 같기도 하다. 수령이 오래된 고목껍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박수근은 이런 우둘투둘한 거친 화강암 같은 질감으로 회백색을 사용하여 나무들과 40-60년대 가난한 서민들의 생활을 화폭에 즐겨 담았다.

 

박수근이 그린 나무는 잎사귀 하나 없이 옷을 벗은 모습이다. 그는 봄, 여름, 가을이 없는 겨울만 존재하는 세상을 살았던 것 같다. 앙상하게 서있는 나무는 생명을 다한 듯이 서있지만 고목(枯木)은 아니다. 추운 겨울을 버티고 이겨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혹독한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나목이다.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 캔버스에 유채, 1962, 리움미술관





박수근의 그림에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며 다채롭지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라고 말할 정도로 인물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그린 인물들은 원근감을 무시한 평면적인 표현에 이집트 벽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측면을 그린 것들이 대부분이다.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광산업에 손댔다가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어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보통학교(초등학교)를 마치고 그 이상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그는 화가의 꿈을 접지 않고 독학으로 그림을 그린다.

상급학교 진학이 무산된 것에 대한 좌절감, 혼자 미술 공부를 하면서 벽에 부딪치는 한계. 재료조차도 조달이 쉽지 않은 궁핍한 생활,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이 그의 내면을 항상 무겁게 짓눌렀지만, 그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억척스러움에 증명이라도 하듯이 18세인 1932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봄의 농촌 풍경을 그린 수채화 봄이 오다를 출품하여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박수근이 20대 중반에 빨래터에서 첫눈에 반한 김복순에게 보낸 연서를 보면 화가가 되겠다는 그의 꿈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 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연서를 받은 김복순은 박수근의 진실성과 화가로서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한다.






박수근, 귀로, 하드보드 위에 유채, 1964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 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정치, 사회적인 격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가난했고 삶이 막막하기만 했다. 박수근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유를 찾아 월남한 박수근은 가장으로서 생계를 위해 주한 미 8군 PX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한다.

온종일 딱딱한 의자에 앉아 초상화를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밤이 이슥하도록 자신의 그림에 매달렸다.  

어려운 삶 속에서도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보면 힘이 솟았다. 그의 부단한 노력은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스스로 터득한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자신만의 화풍을 정착시킨다.

 

박수근은 소설가 박완서를 탄생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문학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거가 부추긴 것은 아니다.

그녀는 나이 40에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서 나목이 당선되어 소설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6·25 전쟁 중 서울의 미군부대 PX에서 미군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주며 근근이 살아가던 박수근을 모델로 한 작품이었다. 그 당시 박완서는 PX에서 초상화 그리는 화가들의 매니저로 근무했다.

 

박수근이 세상을 떠난 해인 1965년, 한 갤러리에서 그의 유작전이 있었다.

전시회장을 찾은 박완서는 그의 작품을 감상하러 몰려드는 관객과 작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을 목격한다. 살아생전 초상화와 자신의 그림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찌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박수근을 떠올리며 그를 주인공으로 한 글을 써야겠다는 강한 충동을 받고 쓴 작품이 바로 나목이다.  





박수근, 빨래터, 캔버스에 유채, 15  x 31cm, 1954





박수근은 서울 동대문 창신동의 판잣집들이 즐비한 허름한 동네에 있는 작은 한옥에서 살았던 52년부터 63년까지가 화가로서 인생의 황금기였다. 자신의 화풍이 확립되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1952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 미술협회전람회에서 입상하였고, 1956년에는 국내 최초 갤러리인 반도화랑 개관 전에 김종하 화백과 함께 2인 전에 참여하였으며, 1958년 조선일보사 초대전, 마닐라 국제전 등에 출품하는 등 국내외 미술전에 여러 차례 참가하였다.

반도호텔에 투숙하는 미국인 미술 애호가들은 반도화랑을 통하여 그의 작품을 매입하기도 했고 그에게 미술재료를 후원하는 이도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1959년에는 국전 추천 작가가 되었고, 제11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이 되었다.

이러한 화려한 경력과 작품 판매와는 다르게 그의 삶은 여전히 가난했고 버거웠다. 그때만 해도 그림 값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작품이 헐값에 팔렸기 때문이었다.

 

박수근은 백내장을 제때 치료하지 못하고 방치했다가 1963년 수술을 받았으나 시신경이 끊어져 한쪽 눈을 실명했다. 화가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그의 좌절감을 잊기 위하여 술에 의존했고, 이로 인해 간경화의 원인이 되어 1965년 5월, 51세라는 창창한 나이에 눈을 감는다.

 

많은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박수근 역시도 살아생전에는 비평가나 일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작품들이 재평가되고 유명세를 타며 작품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2006년 한 경매에서 시장의 사람들이 25억에 낙찰되고, 그다음 해엔 빨래터가 45억 2000만 원에, 2015년에는 앉아있는 소녀가 19억 5923만 원에 낙찰되었다.

현재 그의 그림값은 호(22.7 ×15.8cm) 기준으로 2억이 넘는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국내 작가 중 단연 압도적으로 1위이다.

 

평생을 가난과 맞서 싸워야 하면서도 한순간도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던 박수근.

일본 유학파들이 장악한 화단에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화가로서 멸시와 차별을 감내해야만 했던 박수근.

긴 터널에 갇힌 것처럼 어둡고 암울한 현실이었지만, 걷다 보면 밝은 빛이 자신을 맞아주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박수근.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정립하여 한국화단의 거대한 거목으로 우뚝 설 수 있었고, 20세기 가장 한국적인 화가라는 평가와 함께 국민화가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박수근, 노변의 행상, 캔버스에 유채, 31.5 X 41cm, 1956 - 1957년경,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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