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가수 이적의 '거짓말'을 아벨미가 흥얼거리다.

세상의 주인 되기

by Jay Kang

몰타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그리스 아테네 여행을 마치고 어제 집에 돌아왔다. 짐을 풀고, 아테네에서 입었던 옷들을 세탁기에 돌리며 재충전의 시간을 보냈다.

역시, 집이 최고다.

유럽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처음엔 감탄으로 가득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소 비슷비슷한 느낌에 싱거워지기도 한다. 광장, 박물관, 성당... 순서만 다를 뿐 결국 비슷한 구조다. 그래서인지 여행이 3일을 넘어가면 어김없이 몰타 집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아테네를 여행하던 어느 날, 친구 아벨미에게 “집에 돌아가고 싶다”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그는 “여행을 즐겨. 한국에서 여기까지 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즐겨야지!”라고 답장을 보내왔다.

맞는 말이다. 한국에서 유럽 10일 패키지여행을 하려면 4~5백만 원은 우습게 든다. 시차에 적응할 틈도 없이 도시를 옮겨 다니는 강행군이다. 아벨미의 말에 힘을 얻어 남은 일정을 잘 마무리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벨미는 신기한 사람이다.

주말 아침,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아벨미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서 어디선가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가수 이적의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예전에 내가 몇 번 들려준 적이 있었는데, 이젠 아벨미가 이 노래를 좋아한다고 말해준다.


12월의 몰타. 겨울이지만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 한 점 없이 온화하다. 몰타의 겨울은 해풍 때문인지 갑작스레 바람이 불거나 소나기가 쏟아지기도 하는데, 오늘은 일기예보를 보니 하루 종일 화창하다고 했다.

‘바닷가 산책이나 다녀올까?’ 생각하고 있던 찰나, 집주인이 느닷없이 오후 2시 30분에 아벨미와 함께 근처 동네로 소풍을 가자고 제안해 왔단다.


뜻밖의 제안에 살짝 어색한 기분도 들었지만, 그가 주말 황금 같은 시간을 임차인인 우리에게 내어준다는 게 고마워 준비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오후 2시가 되도록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고, 3시가 되어도 기미가 없었다. 약속은 무산된 듯했다. 아벨미에게 외출한다고 전하고는 남은 오후 시간이 아쉬워 급히 산책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에서 어디를 갈지 검색해 보았지만,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오후 5시 해가 지기 전까진 두 시간 남짓. 멀리 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망설이다가, 늘 바닷가만 가봤지 근처 마을은 제대로 둘러보지 않은 것 같아 공항 근처에 있는 Zejtun 마을로 향했다.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이라 그런지 버스엔 나를 포함해 단 두 명뿐. 정류장마다 승객도 없었다. 평소엔 40분 걸릴 거리였지만 오늘은 단 25분 만에 도착했다.

계획도 없이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 마을 중심에 있는 16세기 바로크 양식의 Zejtun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옆엔 박물관도 있었지만, 연휴라 그런지 문이 닫혀 있었다. 길거리도 한산했고, 간혹 승용차 몇 대만이 조용히 지나갔다.

대우 르망자동차


그러다 우연히, 오래된 대우자동차 르망이 골목에 주차되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90년대 출시되었던 그 자동차. 바퀴 휠에 선명히 박힌 대우 마크. 신기하게도 그 시절 한국에서 보던 바로 그 차가 맞았다.


마을 자체가 한적하고 조용했다. 성당 근처에 문을 연 Bar 몇 곳이 있었고, 그 앞에 몇몇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며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동양인인 나를 유심히 쳐다보는 시선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바를 지나니 이번엔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마치 작은 클럽 같았다. 문득, 맥주 한 잔으로 목이나 축일까 싶었지만, 낯선 동네에서의 경계심과 시선을 의식하게 되어 조용히 지나쳤다.


그렇게 동네를 천천히 걷다 보니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황금 같은 주말, 익숙한 거리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맞이한 따뜻한 겨울날이 아쉬웠지만, 집주인과의 약속이 무산된 아쉬움을 산책으로 덮고 돌아가기로 했다.


구글 지도가 알려주는 정류장에서 81번 버스를 기다리며, 이렇게 주말이 흘러간다.

담장에 걸린 크리스마스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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