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순간들 6편

그 해 서울의 여름, 그리고 가을


1988년 서울의 공기는 이상하게도 들떠 있으면서도 긴장되어 있었다. 잠실 일대에는 알록달록한 플래카드와 풍선이 걸려 있었고, 길거리에서는 떡꼬치와 호떡 냄새가 올랐다. 사람들 틈새로는 군청색 제복들이 바삐 오갔다. 축제와 경계가 한 자리에 섞여 있는 여름이었다.


이민호는 그 한가운데, 운동장 옆 임시 응급진료소에 서 있었다. 스물넷, 의대 3학년. 오늘 하루의 이름은 ‘학생’이 아니라 ‘의무 요원’이었다. 흰 완장 위에 빨간 십자가가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부모님은 “올림픽에 참여하다니 대단하다.”며 자랑스러워했고, 친구들은 “야, 외국 선수 쓰러지면 네가 살리는 거냐?”라며 웃었다. 정작 민호 자신은 그저 “사고만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진료소 앞에는 오전부터 사람들이 줄을 섰다. 발이 까진 관중, 햇볕에 어지러운 자원봉사자, 계단에서 미끄러진 아이. 안쪽 벽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공정한 순서 유지. 예외 없이 진료할 것.”
민호는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규정을 잘 지키는 게 오늘 자기 역할이라고 믿고 있었다.


첫 번째 순간은 점심 무렵에 찾아왔다. 햇빛이 콘크리트 위에서 튀어 오르던 시간, 줄 맨 끝에 서 있던 회색 모자의 노인이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벽에 기대었다. 옆에 있던 손자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할아버지, 숨 쉬어요? 괜찮아요?”
노인의 얼굴은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해 갔다.


앞줄에 서 있던 사람 하나가 민호와 눈이 마주치자 이렇게 말했다.
“우린 다 기다리고 있는데, 차례는 지켜야죠.”
맞는 말이었다. 줄을 깨면 뒤에서 불만이 쏟아질 것이다. 규정을 어기면, 내일부터 이 응급실은 더 복잡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인의 입술에서 떨어진 말 한 마디가 민호의 귀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숨이… 잘…”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그 한 마디와 함께 노인의 무릎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생각은 복잡했지만, 몸은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다.
“잠시만요!”
민호가 앞줄을 향해 소리쳤다.
“가슴 통증이 있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을 먼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누군가는 얼굴을 찌푸렸고, 누군가는 작게 투덜거렸다.
“뭐야, 자기 친척이야 뭐야…”
그러다 뒤쪽 어딘가에서 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슴 아프다잖아요. 그냥 보내줘요. 우리는 좀 더 기다리면 되죠.”


민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노인을 부축해 안으로 데려갔다. 손이 약간 떨렸지만 부정맥과 혈압을 재고, 산소를 대고, 약을 준비하는 동안 몸은 제 할 일을 해냈다. 다행히 노인의 상태는 곧 안정되었다.


“고맙네… 선생.”
노인은 힘겹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진료소 밖에서 여전히 작은 불평이 오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말 한 마디가 민호의 귀를 꽉 채웠다. 그는 그제야 생각했다.
‘규정을 지키지 않은 건 맞지만… 그래도 오늘, 이 선택을 후회하진 않을 것 같다.’


그 순간, 아주 먼 위쪽에서 누군가가 그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아래도, 하루의 길이도 의미 없는 자리. 그 의식은 선을 따라 흐르던 한 사람의 삶이 잠깐 옆으로 꺾이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굳이 하는 쪽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그에게 그런 장면은 하나의 작은 정점으로 보였다.


오후가 깊어질수록 경기장의 열기는 더 올라갔다. 어느 순간, 관중석 한 모퉁이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어났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관중 여러분, 정치적 구호와 피켓 사용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에는 손으로 급히 쓴 종이 피켓을 든 청년이 서 있었다. 피켓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하나의 한반도, 하나의 팀.”
경비원 두 명이 다가와 청년의 팔을 붙잡았다.
“지금은 올림픽입니다. 이런 건 안 됩니다.”


청년은 크게 소리치지 않았지만, 쉽게 물러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이게 그렇게 큰 잘못입니까? 그냥 같이 뛰자는 뜻인데요.”


민호는 처음엔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정치적인 문제에는 엮이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이 상황에서 의무 요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상처만 보고 내려오는 것뿐일지도 몰랐다.


그때, 청년의 손등에서 붉은 피가 번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방금 넘어지며 깨진 유리에 베인 듯, 손가락 사이로 피가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청년은 “괜찮아요, 안 아파요.”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손은 분명히 떨리고 있었다.


민호는 다시 한 번 갈림길에 섰다. 상처만 보고 조용히 돌아설 것인지, 아니면 이 장면 한가운데로 들어갈 것인지. 잠시 뒤, 그는 구급 가방을 들고 계단을 뛰어 올랐다.


“잠깐만요, 먼저 상처부터 봐야 합니다.”
민호가 경비원과 청년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이대로 두면 더 깊게 패일 수도 있어요. 이건 의료 문제입니다.”


청년은 여전히 피켓을 꼭 쥔 채 민호를 노려보았다.
“선생님, 손은 나중에 봐도 됩니다. 이 말만… 잠깐만 들고 있으면 안 됩니까?”


민호는 청년의 손등에 거즈를 댄 채 천천히 말했다.
“이 종이는 오늘 말고도 또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손은… 지금 아니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경비원은 그 말을 듣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단 내려가서 치료부터 받읍시다. 이런 피켓은 이 안에서는 좀…”
청년은 결국 피켓을 접어 가슴에 안고 민호를 따라 내려왔다.


응급실 안에서 소독약 냄새가 스며드는 사이, 청년이 물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무엇에 대해요?”
“하나의 팀으로 뛰자는 거요. 그런 꿈 같은 소리요.”


민호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한 박자 늦게, 천천히 말을 고르며 말했다.
“저는… 누가 다치지 않는 쪽이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내일도요. 그래도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아주 모르는 건 아닙니다.”


청년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 정도면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던 의식은 이 장면에서 아주 잠깐 망설였다. 만약 이때 청년의 마음에 조금 더 용기를 보태거나, 반대로 더 큰 두려움을 심어 준다면, 다음 몇 년의 갈래가 아주 조금 달라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끝내 손을 내리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가장 날카로운 정점은, 누군가의 ‘밀어주는 힘’이 아니라 스스로 고른 방향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해가 기울면서 운동장 밖은 점점 붐비기 시작했다. 안내 방송이 잇달아 나왔다.
“관중 여러분, 안전한 귀가를 위해 질서정연한 이동을 부탁드립니다.”


민호는 진료소 안을 정리하고 외투를 걸쳤다. 오늘 해야 할 일은 거의 끝난 것 같았다. 집에 가서 씻고, 텔레비전으로 저녁 경기를 보다가 잠들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그때, 출구 쪽에서 짧은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조심하세요!”라고 외쳤다. 계단 아래쪽에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쏠리며 작은 파도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이 한 명이 울음을 터뜨렸고, 누군가는 중심을 잃고 앞으로 넘어질 듯 비틀거렸다. 그 틈 사이로 노점상의 손수레가 계단 안으로 억지로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 나가래요, 자리 비우라잖아요!”
노점상은 서두르느라 주변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 손수레, 유모차가 위험한 각도로 겹쳐 있었다. 그대로 두면 누군가는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위쪽에서, 의식 하나가 조용히 그 장면을 들여다봤다. 만약 이대로 흘러가게 두면, 두세 사람은 심한 부상을 입을 것이다. 그중 한 사람은 평생 한쪽 다리를 저는 삶을 살게 된다. 만약 지금 누군가가 계단 중간에서 사람들을 잠깐만 막아 준다면, 그 사고는 ‘조금 붐볐던 기억’ 정도로 줄어들 것이다. 그 의식은 알고 있었다. 이 선택은 눈에 보일 만큼 분명한 갈래라는 것을.


그는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마음만 먹으면 한 사람의 시선을 계단 쪽으로 더 강하게 끌 수 있었다. 혹은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세운 규칙을 떠올렸다.
“나는 기록자다. 개입자가 아니다.”


그 규칙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었다. 오늘 같은 날에도 마찬가지여야 했다. 그러니 그는 숨을 가늘게 내쉬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 순간, 민호의 귀에는 울음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크게 들려왔다.
‘저기, 누가 좀 정리해 주면 좋을 텐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출구 쪽을 돌아보았다. 경찰 둘이 멀찍이 서 있었지만 이쪽 상황에는 아직 신경을 쓰지 못한 듯했다.


민호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었다.
‘내 일은 어디까지일까. 여기서 멈추면, 정말 끝난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잠깐만요! 손수레부터 빼주세요!”


민호가 계단 쪽으로 뛰어 내려가며 소리쳤다.
“여긴 경사가 있고, 사람들이 밀리면 진짜 위험합니다. 뒤에 계신 분들, 한 줄만 비켜서 기다려 주세요!”


처음엔 여기저기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뭐야, 왜 또 서래.”
“빨리 집 가야 하는데…”


하지만 맨 앞에 서 있던 사람이 한 발짝 옆으로 물러서자, 두 번째 사람이 따라 움직였고, 세 번째 사람도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비켰다. 아이를 안고 있던 엄마는 계단 옆 벽으로 몸을 붙였다. 손수레를 밀던 노점상은 멋쩍은 얼굴로 다시 계단 밖으로 빠져나갔다.


“죄송해요, 오늘 장사가 영 안 돼서요.”
그가 중얼거리자, 민호는 거친 숨을 고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대신 다음부터는 이런 데는 좀 피해서 다니세요. 정말 위험할 뻔했어요.”


짧은 소동은 그렇게 끝났다. 몇 분 후, 사람들은 조금 전 일을 잊은 듯 다시 말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누군가는 집에 돌아가 “오늘 사람 너무 많아서 정신 없었어.”라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마저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민호는 진료소 앞에 다시 서서, 방금 전 자신의 발걸음을 떠올렸다.
‘굳이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런 생각이 작게 따라붙었다.
‘그래도, 이런 굳이가 있어야 내가 나 같지.’


위에서 내려다보던 의식은 그제야 손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조금 전까지 손 안에서 일렁이던 수많은 가능성들이 제자리를 찾아 흩어졌다. 그는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 3차원 세계에는 스스로 굳이 움직이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운동장 자갈길에서 우산을 나누어 들던 시간, 관객석에서 불편한 질문을 받아들이던 시간, 계단 위에서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던 시간. 서로 다른 장면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모두 같은 결로 이어져 보였다.


그는 새 번호를 붙였다.
존재 기록 제1-06a호.
존재 기록 제1-06b호.
존재 기록 제1-06c호.


그리고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역시 흥미롭군”


그가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정점들은 온전히 이민호라는 한 사람의 몫이 되었다. 의식에게 시간과 공간, 수명은 여전히 의미가 없었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서울의 여름이 오래 남을 것 같았다.


밤이 되자 운동장 위로 불꽃이 터졌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누군가는 이 날을 “그냥 즐거웠던 날”로 기억할 것이고, 누군가는 “정말 정신없이 바빴던 날”로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아주 먼 위쪽 어딘가에서, 하나의 의식은 그날의 몇 장면을 조용히 꺼내어 다시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 세가지의 순간이 의식을 향해 질문을 하듯이 정점을 찍었을때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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