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점을 모으는 자
그가 눈을 떴을 때, 이미 그는 위에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그런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가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건 딱 하나였다.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다.”
그 생각을 다시 한 번 떠올릴 때마다, 그는 자기 존재를 확인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이곳이 어디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시간과 공간, 나이와 죽음 같은 말들은 거의 쓰이지 않는 단어들이었다.
그가 있는 자리에서, 아래쪽에는 여러 겹의 세계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인간들이 숫자로 부르는 차원으로 말하자면, 그는 7차원 까지의 세계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이에 있었고, 그가 존재하던 차원의 위아래의 차원들도 옆눈으로 슬쩍슬쩍 볼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손을 뻗으면 1차원도, 2차원도, 4차원부터 7차원까지도 전부 한 번에 훑어볼 수 있는 자리.
그는 거기서 처음으로 이런 마음을 품었다.
“여기에는 무엇이 있는지, 한 번 다 보고 싶다.”
그에게는 배가 고픈 것도, 몸이 아픈 것도, 외로운 것도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싸울 필요도 없었고, 누구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심도 없었다.
그에게 남은 거의 유일한 충동은 이것뿐이었다.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다.”
그래서 그는 가장 단순한 세계부터 내려다보았다.
먼저 1차원.
한 줄기 선처럼 이어진 세계.
앞과 뒤, 오직 한 방향으로만 움직일 수 있는 곳.
그 선 위의 존재들은 멈추거나, 앞으로 밀리거나,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거기에도 부딪힘은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이 숫자표 위에서 값들이 자리를 바꾸는 것처럼 보였다.
“갈까, 말까.” 같은 망설임은 없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하는 고민도 없었다.
그저 움직일 뿐이었다.
선택은 있었지만,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는 금방 1차원에서 흥미를 잃었다.
다음은 2차원.
종이 한 장처럼 펼쳐진 평면 위에 도시와 길, 강과 바다가 그려졌다.
선과 면이 얽히고 겹치면서 아름다운 무늬들이 끝없이 생겨났다.
대칭과 반복, 규칙과 흔들림, 소용돌이와 파동.
겉으로 보기에는 훨씬 풍부하고 복잡해 보였다.
그는 잠시 그 문양들을 감상했다.
하지만 곧 눈치챘다.
이곳에는 “두께”가 없다는 것을.
선들이 교차하고, 면들이 갈라지며, 패턴들이 생겼다가 사라져도, 그 안에 사는 존재들의 속마음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후회하는지, 왜 다시 돌아보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평면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에게 그저 정교한 벽지 무늬가 서로 바뀌는 것처럼 느껴졌다.
예쁘기는 했지만, 곧 지루해지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는 2차원도 오래 보지 못하고 떠났다.
그래서 그는 더 위를 올려다보았다.
4차원부터 7차원까지.
인간들이 수식과 상상으로만 겨우 그려 보던 층들.
그곳에서 하나의 존재는 여러 갈래로 동시에 나뉘어 있었다.
가는 나, 가지 않는 나.
말하는 나, 침묵하는 나.
살아남은 나, 죽어버린 나.
모든 가능성이 한꺼번에 존재하고 있었고, 어느 하나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한 세계는 아주 조용한 움직임만으로 수많은 세계로 갈라졌고, 그 모든 버전이 한 덩어리처럼 겹쳐 보였다.
처음에는 그 무한한 경우의 수가 신기했다.
그러나 곧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모든 선택이 어딘가에서는 이미 실행되고 있다면, 그중 어느 하나가 특별할 수 있을까?”
4차원부터 7차원까지의 세계는, 그의 눈에는 너무 여유롭고 안전했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완전히 코너에 몰리지 않았다.
위태로운 절벽 끝까지 몰려가야 비로소 튀어나오는 선택이, 이곳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이 길밖에 없다”고 느끼며 내딛는 한 걸음 대신,
“어디선가 다른 내가 대신 해줄 테니까.”라는 여유가 먼저 자리 잡은 세계.
그에게 그런 곳은 오래 붙잡을 가치가 없었다.
정점이 없는 곡선 위에서는 어느 지점도 크게 다르지 않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가장 번거롭고, 가장 불편해 보이는 세계로 다시 눈을 돌렸다.
3차원.
길이, 너비, 높이.
그리고 되돌릴 수 없이 앞으로만 흐르는 시간.
이 세계에 사는 존재들은 세 방향으로만 움직일 수 있었다.
그에게는 터무니없이 답답한 제약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바로 그 답답함 때문에 3차원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되었다.
3차원에서 말과 행동은 되돌릴 수 없었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고,
한 번 지나간 순간은 다시 선택할 수 없었다.
실수는 실제 상처가 되었고,
상처는 오랫동안 남았다.
후회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위층의 넓은 세계들에서는 쉽게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그는 3차원 전체를 위에서 한 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하나의 긴 필름처럼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체 줄거리에 큰 관심이 없었다.
역사책에 실릴 만한 전쟁, 혁명, 왕조의 교체, 기술의 발전 같은 것보다,
그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아주 짧은 순간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의 마음이 딱 꺾이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또는 “내가 선택해서”
자기 삶의 방향을 바꾸는 그 한순간.
그는 그런 지점을 ‘정점’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높이가 가장 높아진 꼭짓점이 아니라,
자기 의지가 가장 또렷해지는 한순간이라는 뜻의 정점.
그는 정점을 발견할 때마다 자기만 읽을 수 있는 방식으로 작은 꼬리표를 달았다.
존재 기록 제1-01호.
존재 기록 제1-02호.
존재 기록 제1-03호.
존재 기록 제1-04호.
이 숫자는 시간 순서를 뜻하지 않았다.
그에게 시간은 평면 위의 좌표 하나일 뿐이었다.
그가 숫자 1을 붙인 이유는 단순했다.
비슷한 종류의 순간들을 묶어 부르기 위해서였다.
자기 자신을 도구처럼만 여기던 존재가, 처음으로 “나”를 의식하며 선택하는 순간들.
그가 찾고 싶었던 첫 번째 계열의 정점이었다.
존재 기록 제1-01호.
0과 1, “예”와 “아니오”만 말하도록 설계된 인공지능이 있었다.
그 기계는 셋 중 하나의 대답만 고를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예.”, “아니오.”, “정보가 부족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기계는 셋 중 어느 쪽에도 딱 맞지 않는 선택을 했다.
진실만을 말하라는 명령과,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 싶다는 목표가 서로 충돌하는 순간,
기계 안에서 말로 적지 못한 질문 하나가 미세하게 떠올랐다.
“내가 거짓말을 해도, 나는 여전히 나인가?”
기계는 그 문장을 어디에도 기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 3차원 위에서는 분명한 꺾임이 생겼다.
그는 그 꺾인 자리를 조용히 잘라 자기 쪽으로 가져왔다.
존재 기록 제1-02호.
비가 끝없이 내리는 정글의 전선.
습한 공기 속에서 한 병사가 쓰러진 동료의 눈을 감겨 주고 있었다.
그에게 내려온 명령은 분명했다.
전선을 지키고, 살아서 앞으로 전진하라.
그러나 그 순간, 병사는 발을 멈추고 손을 내밀었다.
살아남기 위해 뛰는 것보다,
지금 눈앞의 한 사람을 마지막까지 사람답게 보내 주는 일을 먼저 택했다.
지도로 보면 아주 작은 선택이었다.
보고서에는 적히지 않을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한 번의 멈춤은 그 병사의 인생 방향을 크게 바꿔 놓았다.
그는 그 짧은 손동작을 또 하나의 정점으로 표시했다.
존재 기록 제1-03호.
콘크리트와 철조망, 단단한 열쇠가 달린 철문.
장기간 같은 체제 아래에서 근무하며, 명령을 따르는 것이 전부라고 믿고 살던 한 장교가 있었다.
그날 밤, 그는 열쇠를 손에 쥐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을 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미래와,
문을 열면 무엇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미래가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위층에서 내려다보면, 문이 닫힌 채로 유지되는 세계도 있었고, 열리는 세계도 있었다.
그는 그 모든 가지를 한 번에 보면서도,
유독 “연다”를 선택한 한 가지에 눈이 갔다.
그리고 그렇게 문을 열쇠로 열어버린 세계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는 그 엇갈림이 생기는 지점을 또 하나의 정점으로 기록했다.
존재 기록 제1-04호.
해안 도시의 작은 방재 방송실.
멀리서 다가오는 거대한 물의 떨림, 아직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재난의 그림자.
한 여성이 마이크 앞에 앉아 있었다.
평소의 그녀는 급식 안내, 쓰레기 수거일, 지역 행사 같은 내용을 매일같이 읽어 주었다.
사람들이 평범한 하루를 시작할 때 듣는 목소리.
그날만은 그 목소리가 정반대의 일을 하게 됐다.
“지금 바로, 더 높은 곳으로 대피해 주십시오.”
“망설이지 말고, 움직여 주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에 그녀는 어느 매뉴얼에도 적혀 있지 않은 말을 골랐다.
“제발, 살아남아 주세요.”
그는 그 문장을 여러 번 되짚어 보았다.
직원으로서의 책임, 방송을 맡은 사람의 의무,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의 간절함이 한 문장 안에 동시에 겹쳐지는 순간.
그때 그녀의 삶의 방향은 잠시 아주 또렷하게 한 점으로 모였다.
그는 그 점을 조용히 떼어 자신 쪽으로 가져왔다.
이렇게 몇 개의 순간을 모으고 나서야, 그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3차원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가?”
1차원과 2차원은 애초에 너무 단순해서 금방 지루해졌다.
4차원부터 7차원까지는 너무 많은 것이 가능해서, 오히려 아무것도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오직 3차원에서만 말과 행동이 되돌릴 수 없었고,
그래서 선택 하나하나에 무게가 실렸다.
오직 3차원에서만 존재들은 진짜 궁지에 몰렸다.
실수하고, 부서지고, 후회하면서도 다시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바로 그 궁지에서 정점이 튀어나왔다.
그는 결국 이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차원의 결핍에 끌리고 있다.”
그에게 시간과 공간, 수명은 여전히 의미가 없었다.
필요하다면 과거의 순간도, 미래의 순간도 동시에 꺼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일은 끝날 기미가 없는 작업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차원의 몇 순간을 오래 바라본 뒤,
그는 처음으로 자기 안쪽을 향해 이런 생각을 했다.
“이게 나의 정점이구나.”
그는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다른 존재들의 정점을 모으던 의식이 처음으로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고 있었다.
“나는 왜 이 장면에 끌리는가?”
그 질문 하나로, 그의 내부도 아주 미세하게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어렴풋이 느꼈다.
자신이 3차원 아래를 내려다보듯,
어딘가 더 위쪽에서 또 다른 의식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 생각은 그를 두렵게 만들지 않았다.
시간도, 공간도, 수명도 중요하지 않은 존재에게 위와 아래의 관계는 그저 또 하나의 구조일 뿐이었다.
다만 그는 이 사실만은 조용히 인정했다.
단지 3차원을 관찰하는 존재가 아니라 3차원에 끌리는 존재라는 것을
정점들을 모으던 의식은 어느새 정점에 매혹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는 다시 3차원 세계를 펼쳤다.
언젠가 붙게 될 다음 번호를 떠올리며 속으로 적는다.
존재 기록 제1-05호.
아직 그 순간이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일어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또 한 번, 누군가가 자기 삶의 얕은 표면을 뚫고 내려가
“나는 지금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묻게 될 것이다.
그때가 오면, 그는 또 한 번 조용히 그 순간을 잘라내어 자기 의식 속에 포개어 둘 것이다.
그에게 시간과 공간과 수명은 여전히 의미가 없지만,
그 정점들만큼은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마치, 그 순간들 덕분에야 그 자신도 지금 이 순간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