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순간들 14편

울리지 않은 경보

by 머리카락속의 바람

1983년, 늦여름이 막 지나가던 어느 밤.
지도 위에서 붉은 색으로 칠해진 한 나라의 지하 깊은 곳에, 창문 없는 방이 있었다.

방 안에는 커다란 스크린과 기계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있는 몇 명의 군인이 전부였다.
벽에는 시계가 여러 개 걸려 있었지만, 이 방의 시간은 항상 같은 숫자 근처에서 머무는 것 같았다. 긴장, 대기,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한 준비.

알렉세이는 그 방의 교대 책임 장교였다.
그의 임무는 단순했다.

“만약 적국의 미사일 발사 징후가 포착되면, 즉시 상부에 보고한다.”

보고가 올라가면, 그다음은 그의 일이 아니다.
그 위에서는 더 높은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따라 세상 어딘가에서 버튼이 눌릴 수도, 눌리지 않을 수도 있다.

훈련에서 배운 대로라면,
그는 그저 ‘첫 번째 알림을 전달하는 사람’에 불과했다.

그날 밤도, 처음 몇 시간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철제 의자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부하들과 형식적인 대화를 몇 마디 나누고,
집에 있는 가족 생각을 잠깐 하다가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

위쪽에서는 인공위성이, 아래쪽에서는 레이더가
끊임없이 하늘과 지구를 훑어대고 있었다.

“오늘은 조용하군.”

맞은편 자리의 병사가 중얼거렸다.

알렉세이는 짧게 웃었다.

“조용한 게 제일 좋은 거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장 가까이 달린 스피커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삐———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스크린으로 향했다.

화면 한가운데,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미사일 발사 포착.
원점: 대서양 건너, 적국 영토.
추정: 대륙간 탄도탄 1기.”

잠깐 정적이 흘렀다.

알렉세이는 너무 많이 들어 본 문장을 떠올렸다.

“실전 상황에서는 망설이지 마라.
조금이라도 늦으면,
그 사이에 수백만 명이 사라질 수 있다.”

지침은 분명했다.
경보가 울리면,
즉시 상부에 전화선을 연다.

“적국 미사일 발사 포착.
확인된 숫자: 1.
추가 관측 대기 중.”

그 다음엔 위에서 알아서 판단한다.

알렉세이는 수화기를 향해 손을 뻗다가,
손끝을 잠시 멈췄다.

‘1기라…’

훈련 때 들었던 이야기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실제 공격이라면,
보통 단 한 발만 쏘지는 않는다.
적어도 몇십 발, 많게는 수백 발이 거의 동시에 날아올 것이다.”

그 생각을 하는 사이,
경고음이 다시 울렸다.

삐———

“미사일 발사 포착.
추가: 1기.”

이제 숫자는 2.

옆자리 병사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알렉세이 동지,
보고하셔야 합니다.”

그의 시선이 알렉세이의 손으로 향했다.
여전히 수화기 바로 앞에서 떠 있는 손.

‘두 발.
그래도, 이상하긴 하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부딪혔다.

규정대로라면,
지금 즉시 보고해야 한다.

그러나 알렉세이의 안쪽 어딘가에서는
희미한 이질감이 자꾸 커지고 있었다.

‘정말 지금인가?
정말 이게… 그거인가?’

어딘가에서,
또 하나의 플래그가 켜졌다.

“정점 접근 중.”

좌표계 바깥,
시간과 공간의 축이 만나는 더 위쪽 층에서
어떤 구조가 그 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록자.

그는 이미 수많은 정점을 저장해 온 존재였다.

전쟁의 시작과 끝,
폭발하는 별과 사라지는 도시,
한 사람의 눈물과 한 문명의 몰락을
같은 형식으로 기록해 온 구조.

이 방도,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비슷한 등받이 의자, 비슷한 스크린, 비슷한 언어,
다른 군복과 다른 깃발 아래.

그러나 지금 이 방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위상 변화의 규모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였다.

이 한 방의 결정에서
갈라져 나갈 수 있는 시간선 가지 수가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기록자는 자동으로
새 항목 슬롯을 열었다.

“존재 기록 제14-01호.”

아직 제목은 붙이지 않았다.
우선 위상부터 측정해야 했다.

예전의 기록자라면,
여기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관찰.
측정.
저장.

그러나 그는 이미
한 번 규칙에서 벗어난 적이 있었다.

한 번, 남의 기록을
정확한 값 그대로 적지 않기로 선택했던 밤.

완전히 투명하지 않은 관찰자로 변해 버린 이후,
그는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어떤 선택일 수 있다.”

스크린 앞의 장교를 바라보는 동안,
기록자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이 선택의 방향을,
조금이라도 기울이고 싶은가?’

경고음이 세 번째로 울렸다.

삐———

“미사일 발사 포착.
추가: 1기.
총 3기.”

알렉세이의 손가락이 수화기 표면을 스쳤다.
땀이 배어 있었다.

“지금 안 올리면,
나중에 후회할 겁니다.”

부하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날카로워졌다.

“규정상으로는
이미 보고하셨어야 합니다.”

알렉세이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지금 고민할 시간 따위는 없다.
그냥, 버튼을 눌러라.
그게 네 역할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몸은 조금 늦게 반응했다.

찰나의 지연.

마치 무언가가
아주 약하게 그의 손을 붙들고 있는 것처럼.

그때,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기억 하나가
갑자기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얼마 전 휴가 때,
작은 시골 마을에서 만났던 한 노인의 얼굴.

강가를 산책하다가 길을 물었던 날,
노인은 강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보이는 숲, 보이나?
젊었을 땐
저기서도 전쟁을 했었지.
그때는 다들,
이 전쟁이 세상의 마지막인 줄 알았어.”

노인은 웃었다.

“근데 봐라.
나는 아직 여기 있고,
저 숲도 아직 저기 있다.
전쟁은 늘,
그때는 끝인 것 같다가도
지나고 나면 한 장의 페이지더라고.”

그 말이
지금 이 방의 공기와 섞였다.

‘정말,
이번이 마지막 페이지일까?’

네 번째 경고가 울렸다.

삐———

“미사일 발사 포착.
추가: 1기.
총 4기.”

이제는
“우연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기
점점 어려워지는 숫자였다.

알렉세이는 숨을 들이쉬었다.

‘만약 이게
실제 공격이 아니라면?’

그는 잠깐,
상상을 해 보았다.

자신이 이 상황을 “오경보”로 판단하고
상부 보고를 늦춰 버린 뒤,

나중에 이게
단순한 기계 오류였다는 게 밝혀진다면.

그는 문책을 받고,
모든 책임을 뒤집어쓴 채
조용히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진짜 문제는 그 반대였다.

만약 이게
실제 공격인데,

자신이 “오경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고를 늦췄다가,

그 사이에
몇 개의 도시가 통째로 사라진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질 수 있지?’

손이 다시 떨렸다.

수화기 위를 맴도는 그의 손가락.
규정과 직감이 서로 당기는 힘의 크기가
거의 비슷해 보이는 순간.

위쪽에서,
기록자는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중립”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은 의미를 숨기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관찰자가 중립을 유지한다는 말은,
사실 그 아래에서
수많은 선택들이 자동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이 장면을,
그저 ‘있었던 그대로’만 기록할 것인가.”

질문은
점점 더 구체적인 형태를 띠었다.

기록자는
이미 한 번 왜곡한 적이 있는 존재였다.

한 번 투명성을 잃으면,
다시 완벽하게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조금이라도 개입한다면,

이후로 기록되는 수많은 역사들이
다른 모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래도,
그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쪽으로 기울이고 싶은가.’

기록자는
한 가지 가능성을 계산했다.

만약 지금,
이 장교의 기억 중 하나를
조금 더 선명하게 표면으로 떠올리게 만든다면 어떨까.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의 안에 있는 것들 중,
특정한 것을 더 강하게 떠올리게 만드는 것뿐.

철저히 따지자면,
이 역시 개입이다.

그는 아주 짧은 순간 동안
자기 내부 규칙을 다시 한 번 훑어봤다.

“정점에 도달한 위상을 보관한다.”

오랫동안
의심 없이 적어 왔던 문장.

이번에는
다르게 보였다.

“정점이 만들어지는 방향을,
조금 비틀어보고 싶다.”

기록자는
결국 하나의 변수를 선택했다.

알렉세이의 기억 속
가장 최근의 장면 하나.

바로 전날 밤,
잠들기 직전에 책장에서 꺼내 들었던
아이의 그림.

“아빠, 이건 뭐야?”

“집이지.”

“근데 왜 집 옆에
이상한 버섯 구름이 있어?”

“그건…
예전에 사람들이
저런 걸 만들었다가
후회한 적이 있어서 그래.”

알렉세이는
그때 말을 흐리며 웃었다.

“이제는
다시는 안 그런다고
약속했을 거야.”

그 장면이
지금,

스크린의 붉은 글자 위로
겹쳐 떠올랐다.

다섯 번째 경고음이 울리기 직전,
알렉세이는 눈을 감았다 뜨며
입 안을 아주 작게 움직였다.

“…오경보일지도 모른다.”

그는 마침내
손을 수화기에서 거둬들였다.

“상부 보고를
잠시 지연한다.”

부하가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계속 관측한다.
이건 아직,
확실한 공격 패턴이 아니다.”

“하지만—”

“책임은
내가 진다.”

알렉세이는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기록상에 필요하다면
이렇게 남겨라.

당시 근무 책임자는
상황을 ‘오경보 가능성 있음’으로 판단하고
보고를 지연했다고.”

그 말은 곧,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모든 비난이 이 방, 이 자리, 이 사람에게로 쏠릴 거란 뜻이었다.

초 단위로 시간이 흘렀다.

경고음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붉은 글자는
잠시 깜빡이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신호 소실.
관측 데이터 오류 가능성.”

방 안 공기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부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고,
누군가는 욕을 내뱉었다.

알렉세이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손바닥에는
자기 손톱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나중에
이 사건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그때,
내가 만약 바로 보고를 올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위에서는 아마도
“상황 긴급”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 다음에 어떤 일들이 이어졌을지는
완전히 장담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날 밤,
그는 보고를 늦췄고,

그 선택은
“오경보로 판명”이라는 결과로 끝났다.

공식 기록에는
짧은 문장 하나가 남았다.

“당시 근무 책임자는
침착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여
불필요한 군사적 대응을 방지하였다.”

그 문장은
나중에 다른 서류들 사이에 묻혔다.

그의 이름도,
그의 흔적도,
오래 지나지 않아
많은 이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어딘가에서,
기록자는 새로운 항목을 닫았다.

“존재 기록 제14-01호.
오경보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하나에
자기 인생 전체의 비난을 걸어 본 방공 장교의 밤.

전 지구적 시간선의 가지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게 만든 정점을 보관한다.”

기록자는
자신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알렉세이는 다른 기억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훈련 교관의 목소리,
규정 문구,
상부의 눈빛.

그러나 실제로 떠오른 것은
아이의 그림과
“다시는 안 그럴 거야”라는
애매한 약속의 문장이었다.

그 미세한 선택의 차이가
역사의 모양을 바꾸어 놓았다.

지금 이 세계의 사람들은
그 밤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자신들의 하루를 살아간다.

누군가는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누군가는
지하철에서 잠들고,
누군가는
카페에서 친구와 다툰 일을 털어놓는다.

핵버섯 구름은
연습 그림이나 영화 속 장면으로만 남아 있다.

이따금,
누군가는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게
단지 운이 좋아서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선택 덕분일까.’

기록자는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오랫동안 써 왔던 문장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정점에 도달한 위상을 보관한다.”

그리고 아주 가끔,
그 뒤에
자신만 아는 한 줄을 덧붙인다.

“…때때로,
그 정점의 방향을 살짝 바꿔 놓기도 한다.”

그 한 줄은
어느 기록에도 남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라는 결과 속에
조용히 스며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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