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순간들 13편

살짝 기울어진 삶

by 머리카락속의 바람



박지운은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인생은 늘 반 칸씩 비껴간다.’

고등학교 때는 늘 전교 11등이었다. 장학금은 10등까지였다.
첫 입사 시험에서는 최종 면접까지 갔다가, “아주 잘하셨는데요”라는 말과 함께 예비 합격 1순위가 되었다. 정원이 줄어들었다는 연락이 온 건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연애도 비슷했다.
서로 호감이 있는 듯하다가도, “지금은 연애할 때가 아니라서…”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기곤 했다.

‘조금만 빨랐어도, 조금만 늦었어도,
조금만 달랐으면…’

그 문장은 지운의 머릿속에서 습관처럼 맴돌았다.


그런데 반대로,“조금만 달랐으면 여기 없었겠다” 싶은 순간들도 있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하던 해 겨울,
버스를 갈아타려고 횡단보도를 건너기 직전에 신발끈이 풀렸다. 고개를 숙여 끈을 묶고 일어나자,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를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지며 휙 스쳐 지나갔다.

어느 여름에는 오래된 상가 건물에서 야근을 하고 나오던 길에, 핸드폰을 두고 온 걸 깨닫고 다시 올라갔다. 그 몇 분 사이, 바로 앞 골목의 간판이 떨어져 지나가던 행인 둘이 다쳤다는 뉴스를 나중에야 들었다.


기회에서는 반 칸씩 밀리고, 위험에서는 반 칸씩 비켜 서 있는 삶.

그는 그걸 “운이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닌 애매한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그 애매함이 때로는 지치게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버티게도 해줬다.


지금 그는 서울 외곽의 작은 오피스텔에서 살며, 콜센터 야간 상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회사 이름은 길고 번거로웠지만, 한 줄로 요약하면 이랬다.

전국 병원, 요양원, 돌봄시설에 각종 장비와 소모품을 연결해 주는 B2B 물류 플랫폼.

낮에는 영업팀과 계약 담당자들이 움직였고, 밤에는 그처럼 야간 상담팀이 “문제가 생긴 곳”의 전화를 받았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는 여러 개의 창이 떴다.
고객 정보 화면, 재고 조회 화면, 운송 현황, 긴급 출고 가능 시간, 그리고 콜센터의 성과 지표.

통화 건수, 평균 처리 시간, 첫 통화 해결률.
모든 건 숫자로 남았다.


“박 대리님, 오늘도 야간 잘 부탁드려요.”

저녁 근무자가 퇴근하며 인사를 건넸다.

“네, 푹 쉬세요.”

형식적인 인사였지만,
지운은 항상 그 말 뒤에 마음속으로 한 줄을 덧붙였다.

‘오늘 밤도 별일 없기를.’

야간 콜은 낮보다 수가 적었지만, 한 번 들어오면 대부분 급했다.
산소발생기 이상, 수액 펌프 에러, 전동침대 오작동, 약품 배송 누락.

대부분은 기술 지원팀으로 넘기거나,
다음 날 첫 차로 배송을 약속하는 선에서 끝났다.

첫 몇 개의 콜은 평소와 다름없는 문의였다.
주문번호를 잘못 눌렀다, 배송 시간이 애매하다, 가격이 변경된 이유가 뭐냐.

지운은 스크립트를 떠올리며 익숙하게 대답했다.


“네, 고객님. 확인해 보겠습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우선 현재 확인되는 내용 기준으로 안내를 도와드리면요…”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매끄러웠지만,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늘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번 달 평균 통화 시간, 오늘의 처리 건수, 그리고 이번 분기 인원 조정 소문.


“성과 낮으면, 야간 팀부터 줄인다더라.”

누군가 농담처럼 흘린 말이 은근히 오래 남아 있었다.

새벽 세 시를 조금 넘긴 시각, 창밖은 이미 깊은 밤이었는데 비가 오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타고 내려가는 빗방울이 네온사인을 번져 보이게 만들었다.
모니터 화면 위로도 비의 흔들림이 겹쳐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때, 다음 콜이 들어왔다.

“팅.”


이어폰 너머로 약간 떨리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여기는 강북 쪽 ○○요양원인데요…”

자동 분류 시스템에는 “주문/배송 문의”로 표시되어 있었다.

“네, ○○요양원 맞으시죠?
어떤 부분 도와드릴까요?”

지운은 자동으로 인사 멘트를 꺼냈다.

“저희가, 오늘 낮에 산소발생기 두 대 받았는데요.
하나는 설치했고, 하나는 예비로 보관 중이었거든요. 그런데 방금 정전이 한 번 나고 나서, 예비 쪽 전원이 안 들어와요.”


지운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멈칫했다.

“정전이요? 지금은 복구된 상태고요?”

“네, 본관은 들어왔는데요…
별관 쪽은 아직 불이 약해요.
혹시 이거, 기계 문제일 수도 있나 해서…”

화면 상에는 단순히 “장비 문의”라고만 떠 있었다.
규정상이라면 이렇게 안내하면 됐다.

사용 도중 문제가 발생한 경우 제조사 A/S 센터로 연결 →
이상이 긴급 상황일 경우 119 및 지역 응급센터로 연락 안내 →
우리 쪽 기록에는 ‘제조사 안내 후 종료’라고 남긴다.

지운은 입을 열었다가,
말을 멈췄다.

“지금, 산소발생기 사용 중인 분들이 많으신가요?”

“본관에 세 분, 별관에 두 분 계세요.
본관 쪽은 괜찮은데, 별관에 계신 분들 방이… 지금 너무 답답하다고 해서요.
창문을 열긴 했는데, 밖에 비가 와서…”

전화기 너머에서는
멀리서 울리는 알람 소리,
누군가 기침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들려왔다.

지운은 모니터를 내려다봤다.
뛰는 커서, 남은 근무 시간,
옆 창에 떠 있는 오늘의 개인 통계.

규정대로라면,
지금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고객님, 저희는 기기 판매 및 배송 쪽이라,
이런 경우에는 제조사 A/S 센터나 119에 바로 연락하시는 게 빠르고 정확합니다.”

이 멘트를 하고 전화번호를 불러준 뒤,
“감사합니다.”로 마무리하면 된다.

그리고 통화 시간을 줄이기 위해 가능하면 3분 안에 끝내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 문장을 꺼내려는 순간 목구멍이 조금 막히는 것 같았다.

‘규정대로 하는 게 맞지.이건 우리 소관이 아니고…괜히 끌고 가다 더 늦어지면 안 되잖아.’

머리로는 그게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서 아주 미세하게 “지금은 그냥 넘기면 안 될 것 같다”는 감각이 밀려왔다.

이유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전화기 너머의 숨소리 때문인지, 방금 창틀을 타고 흐른 빗물 자국 때문인지,
아니면 단지 오늘 비가 와서 그런지.


“저기… 잠시만요.”

지운이 먼저 말을 붙였다.

“지금 상황을 조금만 더 자세히 여쭤봐도 될까요?”

“아, 네… 지금 별관은,
간이 산소발생기 하나랑, 예비로 보내주신 새 기계 하나가 있었거든요.
근데 정전이 나면서 옛날 기계가 먼저 꺼졌어요.
새 기계를 연결하려고 했는데, 그게… 전원이 안 들어와요.”

“지금 산소 호흡이 꼭 필요하신 분이 몇 분이시죠?”

“두 분인데요. 한 분은 이미 포화도가 많이 떨어져서… 방금 119에는 연락했어요.
근데 여기 골목이 복잡해요 그래서 예전에 한 번 늦게 온 적이 있어서…
혹시 장비 쪽 문제면, 바꿔야 하나 해서요.”

“네, 알겠습니다.”

지운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제조사 A/S 안내.
긴급 상황 시 119 이용 권장.
통화 종료.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교과서 같은 답이 떠올랐다.

하지만 손가락은
다른 창을 열고 있었다.

야간 물류팀 내선 번호,
긴급 출고 가능 시간,
“오늘부로 예산 초과, 야간 출고 자제”라는 공지.

‘이건 내 권한이 아니다.
괜히 움직였다가 책임질 수 있을까.’

그 생각과 동시에,
다른 생각 하나가 거의 동시에 올라왔다.

‘그래도… 이건 그냥 넘기고 싶지 않다.’

“고객님, 혹시 환자분들끼리 상태가 더 안 좋은 분, 덜 안 좋은 분이 구분되시나요?”

“예? 아… 그, 한 분은 기저질환이 많아서
조금만 숨이 답답해도 바로 포화도가 떨어지시는 분이고요.
다른 분은 그래도 조금 더 버티시긴 해요.”

“좋습니다. 그럼 우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같이 해볼게요.”

지운은 평소에는 거의 쓰지 않던
자신의 목소리 톤을 꺼냈다.
스크립트에 없는 말투,
‘상담원’이 아니라 ‘같이 해결해야 할 사람’의 목소리.

“지금 별관 쪽 산소 호흡기 사용 순서부터 조정해 볼게요.
상태가 더 위중하신 분께 최대한 산소를 몰아주고,
다른 분은 창문이 덜 젖는 쪽으로 침대를 옮겨서
외부 공기를 최대한 받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버틸 수 있을까요?”

“지금 바로 새로운 기계를 보내보려고 합니다.
확답은 못 드리지만, 최대한 빨리 움직여 볼게요.”

지운은 통화를 잠시 대기 상태로 돌려놓고,
바로 옆 내선으로 전화를 걸었다.


야간 물류 담당자가 피곤한 목소리로 받았다.

“네, 야간 창고입니다.”

“형, 나 지운인데요.
지금 강북 ○○요양원에서 산소발생기 긴급 교체가 필요하대요.
예비품이 정전 이후에 안 켜진다고 합니다.”

“야, 지금 시각에? 오늘 야간 출고는 다 막혔어.
윗선에서 ‘진짜 불 나는 것만 빼고는 내일로 미뤄라’고 했잖아.”

“여기, 진짜 불 나는 거 같아요.”

지운이 낮게 말했다.

“환자가 두 분이래요.
한 분은 이미 포화도가 떨어지고 있고, 골목 때문에 119 접근도 느린 편이고…”

“그래도 시스템상 주문이 안 올라와 있으면 임마”

“내가 지금 수기로 올릴게요.
내 아이디로 책임지고 결재 걸어둘게.
실적 까져도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오늘만, 한 번만 도와줘요.”

잠깐의 침묵.

수화기 너머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 진짜 너 때문에.
알았어. 가까운 쪽에 지금 대기 중인 기사 한 명 있긴 하다.
지금 부르면 비 맞으면서라도 나갈 수는 있어.”

“제발.”

“근데, 이거 나중에 윗선에서 까고 들어오면 나도 모르는 거다?”

“그럼 그냥, 기계가 하나 ‘골라서’ 나간 걸로 해요.”

농담처럼 던졌지만,
둘 다 웃지 않았다.


지운은 다시 요양원과의 통화로 돌아갔다.

“고객님, 지금 가까운 쪽 기사님 한 분이
장비 한 대를 싣고 출발하셨어요.
비 때문에 조금 늦어질 수는 있는데,
최대한 빨리 가도록 요청했습니다.”

“정말요? 지금 이런 시간에…?”

“네. 그동안은 말씀드린 대로 상태가 더 안 좋으신 분 위주로 산소를 집중하시고,
다른 분은 최대한 외부 공기를 받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혹시라도 더 떨어지는 기미가 보이면
바로 119에 재연락하시고요.”


상대방의 숨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통화가 끝나고, 지운의 통화 시간 지표는 평소보다 길게 늘어나 있었다.


“오늘 야간, 효율 떨어졌네?”

같은 팀 동료가 옆자리에서 슬쩍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뭐, 그런 날도 있는 거죠.”

지운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속으로는,
‘이게 괜찮은 선택이었을까’라는 생각이
여전히 빙글빙글 돌고 있었지만.

몇 시간 뒤, 교대 시간이 다 되어 갈 즈음
업무 메일함에 짧은 글 하나가 올라왔다.

제목: 야간 출고 관련 감사 연락

내용:
어제 새벽에 산소발생기 긴급 교체 도와주셔서
어르신들 무사히 넘기셨다고
○○요양원에서 연락 왔습니다.
야간팀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그 메일에는
구체적인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야간팀 모두.’

그 안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지운은 알았다.

그날 퇴근길,
비는 그쳤고
도로 위에는 아직 빗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버스 창가에 앉아
지운은 지난 몇 년을 천천히 되짚어 봤다.

합격과 불합격 사이,
사고와 무사고 사이,
연애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
늘 반 칸씩 어긋나 있던 순간들.

그때마다 그는
‘조금만 달랐으면’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이상하게,
그 문장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

‘조금만 달랐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 아닐까.’

원하는 회사에 들어가지 못해서
지금 이 회사에 들어왔고,

이 회사에서 야간 근무를 하게 되었고,

하필 오늘,
하필 새벽에,
하필 비 오는 날,

하필 그 요양원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하필,
자신이 규정 대신 ‘그냥 넘기기 싫다’는 느낌을 따라갔다.

“잘한 걸까.”

그는 중얼거렸다.

틀렸다고 확신할 수도,
완전히 잘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다만,
산소발생기 옆에서 허겁지겁 튜브를 정리하던
누군가의 손이 보이는듯 했고

전화를 끊으며 울먹이던
요양원 직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귀에 맴돌았다.


그걸 떠올리는 순간만큼은
이상하게도, ‘아, 그때가 내 삶에서는 뭔가 정점 같은 순간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버스가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를 할 때,
지운은 창밖을 바라봤다.

빨강, 노랑, 초록.
신호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 번져 있었다.

누군가는 저 빛에 맞춰
멈추고, 걸어가고, 서두르고, 멈칫하겠지.

“조금만 달랐으면”이라는 말이
오늘은 이상하게,
“그래도 이렇게 온 것도 나쁘지 않네”라는 말과 겹쳐 들렸다.

어딘가에서, 이 날 새벽의 기록이 한 줄 남았다.

“존재 기록 제13-01호.
수많은 반 칸의 어긋남 끝에서
처음으로 ‘그냥 넘기고 싶지 않다’는 감각을 따른 야간 상담원의 선택.

그 정점을 보관한다.”

그 기록 어딘가에는,
선택의 무게와 좌표가
실제보다 아주 미세하게 조정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왜곡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지운은 알지 못했다.

그는 다만,
오늘도 자신의 자리에서
다음 전화를 받을 준비를 할 뿐이었다.

언젠가 또 다른 새벽에,
비슷한 갈림길이 찾아온다 해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로
수화기를 들 것이다.

그가 느낀 그 “살짝 기울어진” 감각은,
어쩌면 이미
누군가의 기록 속에서 조용히 증폭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화요일 연재
이전 12화존재의 순간들 12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