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변하지 않으면 잉여가 된다>

경계가 사라진 시대, 방송국 밖에서 더 팔리는 구성작가의 영업비밀

by 나프리
교양이야 예능이야? 하나만 딱 정해!


'순혈'의 종말과 '박쥐'의 재발견

2016년, 제가 방송계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이 바닥은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 허용되지 않는 엄격한 이분법의 세계였습니다. 교양 작가는 시사, 다큐만 파야 했고, 예능 작가는 웃음만 짜야 했죠. 둘 사이를 오가는 건 정체성 없는 '박쥐' 취급을 받거나, 전문성 없는 '뜨내기'로 낙인 찍히기 딱 좋은 행동이었습니다.


당시의 불문율은 명확했습니다. "나무처럼 한 곳에 깊게 뿌리내려라." 상근직으로 성실히 출근해 메인 작가가 되어야만 비로소 '내 것'을 할 자격이 주어진다고 믿었습니다. 투잡, 쓰리잡은 언감생심이었죠. 하지만 2019년, 불과 3년 만에 저는 그 견고한 믿음에 균열을 내기로 했습니다.


수직의 나무가 아닌, 수평의 딸기 줄기처럼

저는 기존 생태계가 정한 '성공의 사다리'를 거부했습니다. 대신 생존을 위한 저만의 룰을 세웠습니다. 방송작가라는 직업을 숭고한 예술이 아닌, 철저히 '생존을 위한 도구'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안정과 자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순 없었기에 저는 한 곳에 머물러 위로만 자라려는 '나무'의 삶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딸기 줄기'가 되기를 택했습니다. 옆으로, 더 넓게 뻗어나가며 비옥한 땅이라면 어디든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 삶. 그것이 제가 정의한 새로운 성장이었습니다. 방송국이라는 거대 조직의 부속품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1인 기업이자 디지털 노마드가 되기로 한 거죠.


그런데 문제가 생겼죠. 방송구성작가 중에 진짜 디지털 노마드가 보이지 않는 겁니다. 사실 지금도 주 1~3회 출근 정도로 타협하는 경우는 많아졌지만 100% 디지털 노마드로 사는 작가들을 보긴 어렵습니다. 지금도 어려운데 당시엔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 그렇게 주변의 우려 속에 시작된 저의 선택은 지금, 하나의 경쟁력으로 대체 불가능한 무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잡종 - 기묘한 포트폴리오의 탄생

제 클라이언트 리스트는 이질적인 것들의 기묘한 동거를 보여줍니다. 방송국의 점잖은 보도자료 옆에 대기업의 세련된 브랜드 필름이 있고, 교육 대본 옆에 유튜브 B급 대본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교양의 논리로 예능을 풀고, 예능의 화법으로 기업 브랜딩을 하는 것. 어느 한쪽으로 속하지 않았던 그 경계인의 애매함이, 현재 유연한 '하이브리드'로 재배치된 것이죠.


AI와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시대, 변화하지 못하는 인간은 착취당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잉여'가 된다고 하죠. 저는 그 말을 체감하고 가장 공감하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고작 5-6년 전과 지금의 콘텐츠 생태계가 달라진 걸 보면 앞으로 마주할 기술 변화에 대처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체감합니다. 급변하는 콘텐츠 환경에서 "나는 다큐 작가니까 다큐만 쓰겠다"라고 고집하는 건,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나는 바이올린 연주자니까 연주만 하겠다"라고 외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진 거죠.


이제 작가의 경쟁력은 한 우물을 깊게 파는 것보단 '어떤 우물이든 길어 올릴 수 있는 두레박 기술'에 있습니다. 장르의 국경이 무너진 시대. 경계를 넘나들 줄 아는 '잡종'의 지분이 커지고 있습니다.


확장되는 파이를 향하여

그래서 잡종의 노하우를 동료들, 또 필요한 이들과 나눕니다. 내 비법을 공유하면 내 몫의 파이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우리가 놀 수 있는 판 자체가 커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기에, 역설적으로 어디로든 글을 배달할 수 있었던 저의 기록. 이 책은 단순한 작법서가 아닌, 격변의 시대에 유연하게 뿌리내린 한 '글:라이더'의 치열한 배송 일지입니다.


지금부터 그 자유로운 배송 경로를 공개합니다.



chapter1 [집하] 잘못된 주소는 없다

-다이아몬드 협찬? 그거 어떻게 하는 건가요?

-내 손목과 이별하는 가장 빠른 방법 '프리뷰&자료조사'

-저... 글은 언제 쓰나요? '막내의 잡일'

-돈이 밀려요...

-어서와 '시사'는 처음이지?


chapter2 [분류]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막내 작가 3년 차, 메인으로 강제 입봉 썰

-서브작가로 투 잡을 시작하다

-애청자에서 메인 작가로

-나에게 너무나 어려운 예능 생태계

-유튜브 포함 뉴미디어 콘텐츠, 뭐가 다를까?

-웹드라마를 쓰라고요?



chapter3 [특송] 까다로운 고객을 위한 맞춤 배송

-대기업은 다르다! 수정 도르마무의 늪에 빠진 썰

-이렇게도 일을 하게 된다고?

-아시아 4부작 한국 메인 작가 경험

-공공기관 정책 콘텐츠는 뭐가 다를까?

-연말 연초 쓰게 되는 입찰 제안서란?


chapter4 [직배송] 와이파이만 터지면 어디든 갑니다

-미팅하러 어디까지 가봤니?

-섭외 작가? 현장 작가?

-ASMR 콘텐츠를 직접 제작하다

-1년에 1~2달 해외로 떠나는 이유


chapter5 [반품 불가] 사람은 AS가 안 됩니다

-이 바닥에서 나를 매장시킨다고?

-어디까지가 배움이고, 어디까지가 갈굼인가

-일로 만난 사이 쿨하게 안녕한 썰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커야하는 동료


[추가 기획]

-장르별 각종 양식 설명

-실전 기획안 & 구성안 분석


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