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아몬드 무료 협찬? 그거 어떻게 하는 거죠?

Chapter 1 [집하] 잘못된 주소는 없다 중

by 나프리
막내야. 이번 촬영에 다이아몬드 반지 필요하니까 협찬 연락 돌려~

막내 "네? 다이아몬드요? 큐빅도 되나요?"

대표 "아니. 리얼해야 하니까 진짜 다이아로."

막내 "................."


드라마 대사 같죠? 아니요. 정말 저렇게 툭 업무가 주어졌습니다.

제가 방송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처음 일했던 제작사에서 경험한 일인데요.

2016년, 저는 남들보다 늦깎이 막내 작가를 했습니다.

'나이 많으면 안 써준다'는 업계의 '카더라' 통신에

잔뜩 쫄아있던 터라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죠.

그래서 선택해 들어간 곳이 하필이면 업계에서 악명 높은 '블랙 제작사'였습니다.


대표님은 사무실이 너구리 소굴이 되도록 줄담배를 피워댔고,

화장실은 민망한 남녀 공용이었으며,

출퇴근 시간은 '10 to 10'이라 쓰고 '10 to 익일 새벽'이라 읽는 곳.


하지만 몸이 힘든 건 어느 정도 각오했으니 견딜만 했습니다.

진짜 힘들었던 건, 저 스스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거였죠.


출연자가 철제 책상이랑 15인용 업소용 밥솥이 필요하대.


'그냥 제작비로 사면 되는 거 아닌가?'란 속마음은 혀 밑으로 삼키고

'철제 책상 협찬', '밥솥 협찬' 등의 키워드로 검색을 하며

맨땅에 헤딩하듯 저는 하루 종일 전화를 돌렸죠.


"안녕하세요, OO프로그램 작가인데요.

저희 프로그램 취지가 사장님 브랜드랑 너무 잘 맞아서요.

혹시 제품 무료 협찬 가능하실까요? 엔딩 크레딧 스크롤에 상호 넣어드립니다!"


수화기 너머로 흐르는 황당한 침묵. "방송국이 벼슬이냐"는 비아냥.

거절을 당할 때마다 제 수명도 1분씩 줄어드는 기분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촬영 때 쓸 커플룩이 필요하다는 말에 수많은 곳에 전화를 돌렸고

인지도 있는 브랜드에서 옷 협찬을 받기로 하고 매장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빈손으로 나왔습니다. 이유는 '무료 협찬'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달랐던 거죠.

옷을 받아 나오려는데 사장님이 묻더군요.


매장 "촬영하고 다시 돌려주시는 거죠?"

막내 "아... 저희 출연자가 입고 가지는 건데요..."

매장 "어? 그럼 안 될 것 같습니다. 저희가 무료 제공을 한 적은 없어서요."


드라마 협찬을 많이 하는 매장이었고 제가 전화했을 때

방송국 프로그램이니 드라마처럼 무료 협찬(대여)을 해준다고 했던 거죠.

그런데 저는 무료로 제공 받으려는 했으니 매장에서는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어요.

쫓겨나듯 매장을 나오는데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날 현타가 많이 왔죠.


산 넘어 산이라더니, 그렇게 위축된 상태에서 이번엔 다이아몬드 반지 협찬 미션이라니요.....

휴, 그래도 하라니 해야지 어쩌겠어요. 종로 3가 금은방 리스트를 뽑아 전화를 돌렸습니다.

"다이아몬드를 공짜로 달라는 건가요?"부터 "방송국에서는 원래 이렇게 일하냐" 등

온갖 소리를 듣고 또 들어 멘탈이 가루가 될 지경이었죠.

그런데 기적적으로 한 곳에서 "해주겠다"는 답변이 왔습니다. 어찌나 고맙던지.

저는 그길로 종로로 달려가 반지를 받아들었습니다.

반지를 품에 안고 제작사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더군요.

'해냈다'는 성취감이었을까요? 아니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자괴감이었을까요.

분명한 건, 그날 흘린 눈물 덕분에 뼈저리게 깨달았다는 겁니다.


"아, 세상은 절대 만만하지 않구나."


방송국 협찬의 세계

방송을 보면서 "저거 다 돈 주고 산 거야?" 혹은 "다 뒷광고 아니야?"라고 생각하셨나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방송 제작 현실에서 '물품 협찬'은 제작비를 아끼기 위한 피, 땀, 눈물인 경우가 많아요.


PPL은 돈을 받고 제품을 노출해 주는 것인데요.

광고 심의 규정을 따라야 하고, 브랜드 로고가 노출되거나 출연자가 대놓고 리액션을 합니다.


물품 협찬은 돈이 오가지 않습니다.

대신 물건을 무료로 제공받고, 방송사는 그 대가로 '엔딩 크레딧(Scroll)' 협찬 목록에

브랜드명을 한 줄 넣어줍니다. (중소기업, 소상공인 위주인 경우가 많죠)


대여와 증정의 차이

잠깐 쓰고 돌려주는 대여 협찬의 경우는 생각보다 수월합니다.

대신 무료로 증정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촬영 끝나고 출연자가 가지고 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게 좋습니다!


방송구성작가는 '설득'하는 사람이다


협찬 과정을 겪으면서 깨달은 건,

방송구성작가는 단순히 원고지에 글을 채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송구성작가는 기획자이자 영업사원이기도 합니다.

내가 가진 건 '방송에 나간다'는 명분 하나뿐인 상황에서,

상대방(사장님)의 지갑을 열고 물건을 내어주게 만들어야 할 때도 있는 거죠.


100군데 전화해서 1곳 성공하면 되는 게임입니다.

이 게임을 하다보면 99번의 거절은 실패가 아니라 과정일 뿐이라는 '깡'이 생깁니다.

다이아몬드도 공짜로 구해봤는데, 세상에 못 구할 게 뭐 있겠습니까? 이런 깡?ㅎㅎ

(코로나 시절, 치매 관련 다큐를 제작하느라 전국 병원에 촬영 협조를 한 적도 있다는...)


그때 흘린 눈물 덕분에,

지금은 클라이언트가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해도 크게 당황하지 않는 편입니다.

2016년 그 블랙 제작사의 전화기 앞에서

글라이더의 질긴 생존력이 만들어진 셈이죠.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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