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 [집하] 잘못된 주소는 없다 중
방송국에 갓 입성한 막내 작가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혹독하게 마주하는 '통과의례'가 있습니다. 바로 '프리뷰'입니다.
프리뷰는 피디가 현장에서 찍어온 수많은 테이프와 영상 파일,
그 안에 담긴 날것의 소리와 상황을 문자(한글 파일)로 치환하는 작업인데요.
제 경험상 스튜디오 녹화 3시간 기준,
프리뷰 파일은 약 110쪽 내외로 나옵니다.
화면 속 타임코드를 15초 단위로 쪼개고,
출연자의 멘트 한 줄을 받아적다 보면
어느새 창밖이 푸르스름해기 일쑤죠.
프리뷰 난이도는 '장르'에 따라 천차만별인데요.
AI를 활용하지 않았던 제 막내 시절을 기준으로 보면,
교양 다큐멘터리는 비교적 쉬웠습니다. (사투리 제외)
하지만 출연자가 떼로 나오는 '리얼 버라이어티'나
'관찰 예능'을 만나는 순간, 헬게이트가 열리죠.
출연자 다수가 동시에 떠드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오디오가 물리고 물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안 들리면 속으로 절규합니다.
'00:35 (다 같이 웃음)'으로 퉁치고 싶은 유혹과 싸워야 하죠.
시사의 경우에도 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몰카로 찍어 오는 경우, 웅얼거려서 뭐라고 하는지 안 들리거든요.
이 단순 노가다 업무는 꽤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요.
메인 작가는 프리뷰를 보고 편집 구성안을 작성하고
피디는 프리뷰 타임코드를 보고 컷을 찾아냅니다.
그래서 프리뷰를 잘못 적거나 대충 적으면
그 장면은 영영 날아갈 확률이 높은 거죠.
프리뷰어의 손끝에서 방송의 뼈대가 만들어진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막내 작가가 프리뷰를 할 시간이 없거나,
제작비가 넉넉한 경우 전문 프리뷰어를 구하는데요.
'전문'이란 표현을 썼지만 필수요건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내가 구인할 때 바로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최고죠.
물론 유경험자를 선호합니다.
제가 구인했을 때 프리뷰만 하는 분도 계셨고
같은 구성작가들이 알바로 하시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도 2018년 막내 시절 두 달 정도
프리뷰로만 생활비를 번 적이 있는데요.
결과적으로는 소탐대실이었습니다.
손목 터널 증후군을 얻었거든요.
프리뷰로 먹고 사는 일!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라고요ㅠ
2026년 1월 기준,
분당 450, 장당 1,600~2,000원 시세는
10년 전 제가 프리뷰 알바를 하던 때랑 비슷합니다ㅠ
프리뷰어를 구인할 때는 주로 밤샘으로 구합니다.
낮에 찍어온 걸 피디가 저용량 파일로 뽑는 사이
막내 작가는 프리뷰어를 미리 구하고
파일이 뽑히는 대로 프리뷰어한테 메일로 보냅니다.
다음날 편집할 수 있게 밤새 프리뷰를 하는 거죠.
먼저 '절대 잠수타지 않고, 오타 없고,
마감 칼같이 지키는 A급 프리뷰어'들에게 먼저 연락을 돌립니다.
이 바닥, 생각보다 '추노'가 많거든요.
급한데 연락 두절되고 잠수타는 프리뷰어 때문에
수명 줄어들 정도로 놀란 경험이 한 두번이 아니라...
리스트 중에 지금 당장 해줄 수 있는 분이 없으면
친한 동료 작가들에게 물어봅니다.
물론 저도 괜찮은 프리뷰어님들 소개 많이 시켜드렸죠.
요샌 오디오 파일을 글로 바꿔주는 사이트를 많이 쓰죠.
그래서 1차 초벌구이하고 그 다음 들으면서 틀린 내용만 수정하는 식으로 하기도 합니다.
유튜브처럼 양식 다 지켜서 안 해도 되는 건
아예 클로바노트 같은 사이트 활용해서 대략 TC 표기해서 편구를 쓰기도 하고요.
지금도 모니터 앞에서 깜빡이는 커서와 눈싸움을 하고 있을 막내 작가님, 그리고 프리뷰어님들.
부디 손목 아껴가며 하세요. 그리고 기억해주세요.
여러분이 이 프로그램의 '첫 번째 시청자'이자, 편집의 뼈대를 잡고 있단 사실을요.
AI는 '소리'를 듣고, 작가는 '맥락'을 듣는다
프리뷰를 해야 한다면 손목을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 단순 받아치는 AI에게 넘기세요!
중요한 건 AI가 정리한 텍스트 덩어리 안에서 핵심 포인트를 찾는 능력입니다.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이 멘트 뒤에 저 상황 붙이면 되겠다'는 구성은 AI가 대신해줄 수 없으니까요.
우리는 모두 '광부'에서 '편집자'로 진화 중이다
방송국 프리뷰어의 모습은
다가올 미래 노동의 축소판인 것 같아요.
과거엔 무조건 많이, 빨리 적는 사람이 유능했잖아요.
하지만 이젠 AI가 쏟아낸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고,
가치 있는 것을 선별하는 사람이 살아남을 거 같아요.
그러니 '그냥' 보지 말고 '관찰'하세요.
우리는 정보를 해석/활용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앞으로 구성작가의 경쟁력은
이런 필터링 능력에서 나올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