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집하] 잘못된 주소는 없다 중
출퇴근길 지하철 안.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귀에 이어폰을 꽂은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습니다. 소리를 켜지 않은 채 화면을 넘기는 그들이 영상 내용을 이해하고 웃을 수 있는 이유, 그건 바로 '자막' 덕분입니다.
자막만 봐도 내용이 이해되게 써라!
영상 콘텐츠에서 자막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죠.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웃음의 포인트를 짚어주는 양념 역할을 하고, 정보성 콘텐츠에서는 복잡한 내용을 정리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중요한 작업은 '막노동'에 가깝습니다. 솔직히 저는 자막 쓰는 것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힘들 거든요. 보통 손이 빠른 작가들은 10분짜리 영상을 5~6시간이면 끝낸다고 하는데, 저는 영상 1분 분량을 작업하는 데 꼬박 1시간이 걸립니다. 말자막이 많은 다큐멘터리의 경우에는 더 빠르게 할 수 있지만 2~3초도 비면 안 되는 예능의 경우엔 더 걸립니다. 데일리 방송처럼 퀄리티보다는 속도가 생명인 경우에는 마감에 쫓겨 기계적으로 쳐내기도 하지만, 공을 들여야 하는 작품일수록 그 시간은 고통스럽게 늘어나더군요.
자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출연자의 멘트를 그대로 받아 적는 '말자막'과 상황을 설명하거나 재미를 더하는 '상황 자막'입니다. 상황 자막은 콘텐츠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데요. 보통 프로그램마다 정해진 자막 디자인이 있습니다.
[위 포맷으로 작업 시, 자막 예시]
명조 / '함께'였기에 가능했던 일
명조 디자인으로 자막 내용을 디자인해 달라는 약속이죠. 그런데 포맷 안에 없지만 새로운 느낌을 주고 싶거나 정해진 틀이 없을 때도 있잖아요. 저는 그럴 때 원하는 느낌의 타 방송이나 유튜브 장면을 캡처해서 대본에 붙여버립니다. "이런 폰트, 이런 느낌으로 해주세요"라고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그러면 작업자가 알아서 구현해 줍니다. 물론 자막 디자인도 누가 작업하느냐에 따라 퀄리티가 달라져서 케바케인 경우가 많아요.
자막할 때는 화면에 자료가 들어가야 할 곳, 작가가 생각한 CG(컴퓨터 그래픽) 디자인 등도 꼼꼼히 체크해서 표기해야 합니다. 방송국에서는 PD의 디렉팅 하에 종합편집실에서 자막 디자인과 인서트가 이뤄지지만, 유튜브 환경에서는 작가의 대본을 바탕으로 편집자와 CG 팀이 협업하여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S방송사의 유튜브 팀의 경우 취재하는 기자와 정리하는 작가, 그걸 바탕으로 편집하는 편집자, 섬네일과 본편에 들어가는 CG를 만드는 CG팀 등으로 분업화되어 있습니다.
10년 차인데도 자막은 여전히 쉽지 않은 영역입니다. 잘하는 분들도 따로 있고요. 해야 하면 할 수도 있지만 자막은 알바를 맡기거나 팀을 꾸릴 때도 자막 업무를 잘하는 친구에게 전담하게 하기도 합니다. 작가마다 잘하는 게 다 다르거든요.
자막은 '요약'이 아니라 '납득'입니다
처음엔 1분짜리 영상에 1시간을 들이는 게 너무 억울했습니다. 시간 낭비 같았거든요.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니, 제가 1시간 투자해서 이 영상을 보는 시청자들이 빠르게 맥락을 파악하고 재밌다고 느낀다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더군요. 작가의 단순 노동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시청자의 인지 비용을 줄여주는 고부가가치 작업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소통의 가성비를 높이세요!
제가 원하는 디자인을 말로 설명하지 않고 레퍼런스로 찾아서 넘긴다고 했잖아요? 콘텐츠구성작업은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협업이라 모두가 다르게 이해를 할 때가 많습니다. 얼마 전 김선호, 고윤정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에서 세상의 언어는 사람 수 만큼 존재한다고 하잖아요. 소통의 가성비를 높이려면, 즉 협업의 오류를 줄이려면 최대한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게 좋습니다.
AI가 100%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
AI가 대본을 쓰는 시대가 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맥락을 읽고, 비언어적 상황(눈빛, 분위기)을 '상황 자막'으로 번역해 내는 건 아직 인간만의 영역입니다. 기계적으로 받아적는 '속기'는 AI에게 넘겨도 되지만, 콘텐츠의 행간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은 우리의 일이죠!
글을 다 적고 노트북을 덮으려고 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요. 내 인생이라는 영상엔 어떤 자막이 달리고 있을까? 설명이 부족해 오해를 사고 있진 않은지, 혹은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내느라 정작 중요한 진심은 가려지지 않았는지 되돌아봅니다. 1분짜리 영상에 1시간을 쏟아 자막을 다는 정성처럼, 내 삶의 순간들에도 그만큼의 배려가 깃들기를. 오해는 줄이고, 이해는 깊어지며, 소란스러운 세상의 소음을 뚫고 나의 진심이 상대에게 선명하게 가닿기를.
잘 달린 자막 한 줄이 지루할 수 있는 영상을 살려내듯, 나의 태도가 나의 삶을 막힘없이 재생시키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을 여러분의 인생도 막힘없이 재생되길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