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 [집하] 잘못된 주소는 없다 중
이거 출처가 어디예요?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출처가 명확하지 않으면, 그 출처가 제대로 된 곳이 아니라면 하나의 뇌피셜, 버려야 하는 쓰레기가 될 수 있습니다. 자료조사는 프로그램의 장르마다 천차만별이지만, 모든 콘텐츠의 뼈대를 만드는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작업입니다. (막내작가 때 중요한 일들을 많이 하죠ㅎㅎ)
최근 역사 콘텐츠 10부작을 만들 때의 일입니다. 교수님 세 분과 MC 한 분이 이끌어가는 프로그램이었죠. 제작 프로세스를 간단히 되돌아볼까요? 먼저 교수님들과 사전 미팅을 하고, (제작비를 내는) 클라이언트와 제작 방향을 논의한 뒤에야 비로소 '진짜 자료조사'가 시작됩니다. 역사 콘텐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첫째도, 둘째도 '팩트 체크'죠. 인터넷에 떠도는 블로그 글이나 '카더라' 통신을 긁어갔다간 큰일납니다. 공신력 있는 연구 기관의 데이터, 대학교 논문 등 명확한 출처가 박힌 자료만이 살아남습니다. 그래야 전문가인 교수님들께 컨펌을 받을 때도 확실한 코멘트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잘 모르겠는 건 교수님한테 직접 물어보면 교수님들이 자료를 찾아서 주거나 어떤 키워드로 찾으라고 방향을 알려주십니다.
다큐멘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K-POP의 세계적 위상'을 다룬다면, 단순히 "인기가 많다"는 기사를 긁어모으는 게 아닙니다. 이 현상을 분석해 줄 문화 평론가, 현지 팬덤의 소비 패턴, 외국인 멤버로만 구성된 그룹을 과연 K-POP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담론까지. 우리가 하려는 이야기의 논리를 뒷받침할 '근거'와 '사람(섭외 리스트)'을 찾는 과정이죠.
반면 예능 프로그램의 자료조사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예능은 깊이보다는 '캐릭터'와 '화제성'이 중요하죠. 출연자에 대한 A부터 Z까지, 나무위키에 나온 정보는 기본이고 그 이상의 사소한 TMI, 최근 이슈까지 긁어모아 제작진에게 던져줘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실력이 드러납니다. 선배들이 흔히 말하는 '핵심 주제(업계 비속어 '야마')'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입니다. "콘텐츠에서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정확히 파악한 작가는 버려야 할 정보와 챙겨야 할 정보를 생각하며 구분합니다. 반면 핵심을 모르면 쓸데없는 정보만 잔뜩 가져와서 혼쭐이 날 수 있죠. 그래서 위 구인 정보 예시에서도 보듯이 추가 수정을 요청할 수 있다는 걸 명시해 둡니다.
콘텐츠 자료조사마다 페이가 다릅니다. 제 경험을 이야기하면, 깊이 있는 논리 구성이 필요한 다큐멘터리 자료조사는 50~100페이지에 50만 원을 받았다면, 양식에 맞춰 정보를 채워 넣는 예능 자료조사는 100페이지에 5만 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정보의 '양'이 아니라, 그 정보를 선별하고 맥락을 만드는 '기획의 밀도'가 가치를 결정하죠.
요즘은 AI로 자료조사를 많이 하죠. 빨라서 좋지만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AI는 그럴싸한 거짓말의 대가거든요. 출처를 달라고 해서 들어가 보면 없는 사이트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제 주변 작가는 AI에게 먼저 물어본 뒤, 바로 입력창에 이렇게 쓴다고 합니다. "너 왜 거짓말해? 다시 똑바로 말해!"ㅎㅎㅎ AI 시대에도 결국 '진짜'를 가려내는 건 인간의 몫인 거죠.
이제 '찾는 능력'은 경쟁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보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검색창에 단어만 치면 수만 개의 문서가 쏟아집니다. 예전에는 빠르게 찾는 게 경쟁력이 됐지만 이제 '찾는 능력' 자체는 경쟁력이 아닙니다. 잘 버리고, 맥락을 잘 읽어내는 능력이 경쟁력이죠. 예능 자료조사 페이가 왜 더 낮았을까요? 복사 붙여넣기는 누구나 하기 때문이죠. '생각' 없이 노동만 하는 일과 달리 다큐멘터리 조사는 관점이 들어가야 합니다. "이 자료를 쓰면 기획 의도가 더 설득력 있겠다"라고 제안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핵심'을 아는 작가의 태도입니다. 자료조사 단계에서 이미 대본은 시작되고 있는 거죠.
출처를 묻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최근 북리뷰 유튜버가 사이비 교주가 되어 신도들에게 성전 건축 명목으로 수십억 원을 갈취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믿고, 너무 쉽게 분노합니다. 그 믿음과 분노의 틈을 타고 누군가는 신이 되고, 누군가는 사기꾼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구나 싶었죠. 나의 일상에서 누군가 "그렇다더라"라고 말할 때, "그거 어디서 나온 얘기야?"라고 묻는 일이 필요해졌습니다. 나무위키와 트위터, 유튜브 렉카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순 없는 세상이니까요.
그리고 나의 삶에서 '핵심(야마)'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봅니다. 앞서 자료조사할 때 핵심 주제를 모르고 찾으면 버려야 하는 쓰레기가 될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 제 삶도 똑같은 것 같더라고요. 나라는 사람의 '핵심'이 무엇인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으면, 남들이 좋다는 것만 쫓아다니게 되지 않을까하는 불안. "요즘은 이 주식이 뜬대", "저 여행지가 핫하대"라는 알고리즘의 파도에 휩쓸려 다니는 거죠. 출처 불명의 행복을 쫓으며 타인의 욕망을 흉내 내지 않는 삶은 어떤 삶일까. 오늘은 제 추구미를 좀 명상해봐야겠네요.
이 글을 만난 '당신의 세계'도 응원합니다. 당신의 세계가 당신이 필요로 하는 진짜 보석들로 채워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