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역의 미친X과 헤어질 결심-PD편

chapter 1 [집하] 잘못된 주소는 없다 중

by 나프리

방송일을 시작하고 난 후 난생 처음으로 연락처 '차단'이란 기능을 써봤습니다. 그전까지 제게 '차단'이란 스팸 문자나 보이스피싱범에게나 쓰는, 아주 극단적이고 매정한 기능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방송국이라는 정글에 발을 들이고 나서야 깨달았죠. 이 훌륭한 기능을 만든 데에는 다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요.

방송국 출입증 목걸이가 훈장처럼 느껴지던 막내 작가 시절이 있었습니다. 월급도 밀리지 않고,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 프로그램에 합류했다는 사실에 어깨가 으쓱해졌죠. 으쓱했다. 하지만 그 환상이 와장창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인간이 어디까지 무례해질 수 있는가'를 강제로 배우게 됐거든요.

성격은 개차반인데, 그 PD가 능력은 있어.


마치 예술혼은 광기에서 나온다는 잘못된 믿음처럼, 방송국 사람들은 '지랄 맞음'을 '능력'으로 포장하곤 합니다. 그리고 제 첫 메인 피디는 그 미신의 완벽한 실사판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전 직장에서 개명을 하고 왔다는 소문이 돌았을까요. 그런데 이름은 바꿀 수 있어도 그 불 같은 성질머리는 개명이 안 됐던 모양입니다.


야, 경찰서에 전화해봐.


첫 출근날, 피디는 제대로된 인사도 없이 기사를 던져주며 관할 경찰서에 전화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30명이 넘는 스태프가 모여 있는 탁 트인 사무실, 내 바로 옆엔 메인 작가, 앞엔 그 피디가 앉아 있었습니다. 속으로 엄청 쫄았죠. '경찰서에? 전화해서 뭐라고 하지?' 뒤죽박죽 카오스 상태인 속마음을 다독이며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그곳에서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수화기를 들었죠.


"저... 이 사건 진행 상황 좀 알 수 있을까요?"

"이미 송치가 끝난 일이라 할 말이 없습니다."


송치? 송치가 뭔 말이지? 어버버 거리며 저는 바보 같은 말만 반복했죠.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걸까요?"

"하아... 작가님. 저희도 바쁜데 기본적인 건 알고 전화를 주셔야죠. 끊습니다."


뚜.뚜.뚜

전화가 끊기고 제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사무실의 정적을 깨는 굉음이 들렸죠.


'쾅'


피디가 키보드를 내려친 소리였습니다.


"야! 너 미쳤어? 작가라는 게 송치도 몰라?"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어? 기본 상식도 없어?"


30명의 시선이 저에게 꽂혔습니다. 무식해서 죄송하고,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고, 피디님 혈압 오르게 해서 죄송하고... 그날부로 죄송하단 말을 입에 달고 살기 시작했습니다. 피디는 뻑하면 소리를 지르고 얼굴을 구기며 자기 기분에 맞춰 행동을 크게하면서 소리를 내기 일쑤였고 다른 팀 피디들보다 선배라는 것과 원래 저렇다는 조직 내 평판 덕분에 사람들은 저희 팀을 못 본척했죠. 한달이 흐르고 피디가 주는 공포감에 멀리서 목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쿵쾅거리며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됐죠.

아, 나는 위축되면 잘하던 것도 실수를 하는 타입이구나.


취재 동행하는 조연출한테는 더 심하게 굴었습니다. 차를 타고 가는 길에 조연출의 말대꾸에 화가 났는지 도로 한복판에서 갓길에 급정지를 해서 창문에 머리를 세게 박은 일화, 삼일밤을 세우고 본인 편집할 때 필요한 자료 있을 수 있으니 오분 대기조를 시킨다거나, 욕설은 기본이고 비난과 조롱을 아주 잘하는 그 피디는 두 달 사이 8명의 조연출이 잠수를 타거나 그만뒀습니다. 그리고 저도 두 달 째 메인 작가님께 울면서 이야기했죠. 그만두고 싶다고. 그랬더니 이 정도는 견뎌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다시 말했습니다. 작가 일 자체를 그만두고 싶다고.


추운 겨울, 고슴도치들은 서로의 온기가 필요해 모여들지만,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의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고 맙니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찾아야 하는데, 사람한테는 그 거리를 유지해주는 도구가 예의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리를 지킬 줄 모르는 사람과는 인연을 이어갈 필요가 없다는 것도 이때 깨달았습니다.


이 정도는 견뎌야 된다? NO!

이 정도면 끊어야 한다? YES!

상한 음식을 먹지 않듯, 상한 관계도 섭취하지 않는 것이죠.


1년 전, 그때 함께 했던 조연출-지금은 PD가 연락이 왔었습니다. 일을 가리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함께 해보자고 대답하려던 찰나 가장 중요한 말이 붙더군요.


"000 피디님도 같이 하는 일이야."

"......... 내가 너 연락처도 차단해야 할까?"


다음 화에서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이유로 인연을 끊은 '메인 작가'님과의 이야기도 풀어보겠습니다.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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