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역의 미친X과 헤어질 결심-작가 편

chapter 1 [집하] 잘못된 주소는 없다 중

by 나프리

앞 장에서 제가 '피디님'을 차단한 이야기를 했더니, 혹시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 계신가요?


"아유, 그래도 작가들끼리는 끈끈하겠지. 같은 입장이잖아?"


네,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서로 힘듦을 알아주고, 억울함을 대변해줄 수 있는 사람. 하지만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도 있잖아요. 때론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혀 아팠던 이야기들을 해보려고 합니다.


본격적인 차단 썰을 풀기 전에, 차단할 기회조차 갖지 않고 도망쳤던 이야기부터 해야겠네요.


2022년 면접 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KBS에서 성공 후 남산에 작업실을 둔 유명 PD가 대기업과 함께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데 거기 메인 작가님이 취재 작가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면접을 보러 갔었죠. 면접 장소는 파주, 메인 작가님의 작업실이었습니다. 거리가 조금 멀었지만 이 일을 하게 된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설렘과 언젠가는 나도 갖고 싶은 예쁜 작업실에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누었죠.


KBS 출신 유명 PD, 대기업 콜라보, 파주의 그림 같은 작업실. 조건만 보면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는 거절했습니다. 조건과 업무 방식이 쎄했거든요.


"우리 PD님이 해외에 계셔서 시차 상관없이 단톡방 칼답 해야 해. 그리고 겸업하시는 걸 싫어하셔서 겸업은 안 되고, 연봉은 2,400이야."


24시간 대기조에, 족쇄 채우는데 연봉이 2,400만 원? 넷플릭스 같은 OTT 시리즈 이력이 없었기에 해보고 싶었지만 생계형인 저는 수락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죠. 결국 죄송하다며 거절했고 메인 작가님은 PD 몰래 겸업을 하라고 최대한 배려해 주셨지만 저는 거짓말을 하기 싫었습니다.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어요.


3년 뒤 그 작품이 웨이브에 올라왔더군요. 배 아팠냐고요? 아니요. 반가웠어요. 그리고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잠시 생각해봤습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그때 거절하기 잘했단 생각이 들더군요. 어떤 순간에도 주도권은 나에게 있어야 하고, 남들이 보기에 좋은 조건이라도 내 기준에서 아니라면 아닌 거죠.


저에게 거절, 나아가 차단은 나를 지키는 일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 처음 차단했던 작가님은 다큐멘터리계의 거목인 메인 작가님이셨습니다. 제가 평소 존경하던 선배의 소개였기에, 저는 정말 '충성'을 다짐했죠. 워커홀릭인 작가님을 따라 저도 그야말로 모든 걸 불태웠습니다. 새벽 4시 30분에 업무 메일이 와도 “와, 이 시간까지? 존경합니다!"를 외치면서요.


하지만 '존경'이 '공포'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습니다. 본인 뜻대로 안 되면 감정을 그대로 폭발시키는 분이었거든요. 저는 매일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고 어느 날 살얼음판에 금이 가는 사건이 생긴 거죠.


해가 뜨는 걸 보고 잠든 지 1시간도 채 안 된 오전 7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나프리 작가!! 우리 자료, OO일보가 써도 된대?! 그거 해결 못 하면 우리 다큐 엎어지는 거야!"


비몽사몽 정확히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 인지하기도 전, 수화기를 뚫고 나오는 고함에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졌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식은땀을 흘리며 침대에서 튀어 나와 노트북을 켰습니다. 손을 덜덜 떨며 파일을 뒤졌는데...


"저... 작가님. 그 저작권료 정리해서 어제 메일로 보내드렸는데요...?"


수화기 너머의 정적. 그리고 돌아온 대답.


"아, 그래요? 아침부터 미안해요."


뚜-뚜-뚜. 허무했습니다. 존경심은 사라지고 살아야겠다는 본능만 남더군요. 사람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분의 '키링’인 삶을 도저히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작업은 마쳐야했기에 작업이 끝난 날, 다른 일도 같이 하자는 제안에 답장 대신 차단 버튼을 눌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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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차단도 비슷한 유형이었습니다. 이분은 예능판에 계셨던 분이라 다른 유형의 힘듦을 알게 해주신 분이었죠. 5개 팀 중 한 팀을 이끄는 베테랑 메인 작가님의 특기는 ‘뒷담화’와 ‘후배 공 가로채기'였습니다.


저보다 먼저 일을 시작한 서브 작가는 메인 작가님 이야기를 하기 전 항상 회의실 문 아래 틈을 확인했습니다.


"쉿! 메인 작가님이 밖에서 발소리 죽이고 엿듣고 있을 수 있거든요.”


읭?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은 말들은 이후에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직접 경험한 일이 아니었기에 100% 다 믿지는 않았죠.


그러다 저도 하나씩 경험하기 시작했죠.

-후배 커피 사주는 것 금지

-본인이 없는 자리 만드는 것 금지

-후배들이 섭외한 연예인 PD한테 본인이 섭외했단 거짓말

-후배들이 쓴 원고 본인이 다 뒤집어 엎었다는 거짓말

-시도 때도 없는 남의 뒷담화와 편가르기


짜치게 어이없는 일은 비일비재했습니다. 팀 내 생일인 FD가 있었는데 방송 끝난 후 다 집으로 가는 것처럼 하고 메인 작가는 PD와 그 FD를 데리고 프랜차이즈 식당에 왔더군요. 저랑 막내 작가는 배고프니 밥 먹고 가자고 먼저 와 있었는데 말이죠. 민망해하는 PD에게 맛있게 드시라고 했는데 저도 민망하더라고요. 그래도 이런 사소한 일들은 일로 만난 사이니까 넘어갈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건 본인의 허세를 위해 쓸데없는 일로 사람을 닦달할 때였죠. 회의 끝나고 집에 가는 지하철 안, 메인 작가님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회의 자료 언제 정리할 수 있어?”

“아, 저 집에 40분 정도는 더 걸려서 1시간 내로 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아니야. 5분 내로 줘.”


네? 방금 집 가는 길이라고 말했는데... 말이 안 통했습니다. 그리고 5분 간격으로 전화가 왔죠.


"자료 언제 돼? 아직도 멀었어? 5분 안에 달라니까!”

결국 지하철 중간에 내려 눈에 보이는 스타벅스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주문도 못 하고 노트북부터 폈는데, 또 전화가 옵니다. 숨이 턱턱 막혀오더군요. 그래도 PD님이 급히 찾나보다 생각하고 미친 듯이 타자를 쳐서 단톡방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PD님한테 바로 전화를 했죠. 이렇게 급한 거면 회의 마치고 하고 가라고 하시지 그랬냐고요. PD는 어리둥절해 했습니다.


알고 보니, 5개 팀 중에서 본인이 제일 먼저 자료를 올려서 팀장과 담당 PD님한테 "나 이렇게 일 잘해"라고 생색내고 싶었던 겁니다. 정작 PD님은 확인도 안 했고요. 후배의 피땀 눈물을 본인의 성과 포장지로 쓰는 선배. 같은 작가라서 더 잘 알기에 더 잔인했던 그분. 저는 그날부로 그분을 제 인생에서 조용히 로그아웃시켰습니다.


나의 '친절'이 상대의 '권리'가 되게 하지 마세요.


새벽 4시에 답장을 하고, 밤낮없이 전화를 받아주면 상대는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아, 이 사람은 언제든 불러도 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무리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건 착한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무책임한 것일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지적하는 사람은 피합시다!


인생에 정답은 없듯이, 대본이나 인간관계도 어느 정도의 수준만 지키면 됩니다. 본인의 생각만 정답인 양 강요하며, 어순 하나까지 트집 잡아 후배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선배는 '가르침'을 주는 게 아니라 '가스라이팅'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런 사람 밑에 있으면 글 실력이 느는 게 아니라 눈치만 늘게 됩니다.


저는 두 번의 차단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존경하는 선배, 유명한 작가와 일하는 커리어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라는 사람이 부서지면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요. 업계가 좁다는 이유로, 평판이 두려워서 지옥 같은 팀을 꾸역꾸역 버티는 미련함은 버리셔도 됩니다.


빠른 손절과 차단은 나를 지키는 길이기도 하지만 나와 잘 맞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혹시 지금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이 계신가요? 상대가 대단한 사람이라서, 혹은 나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라서 참고 계신가요? 괜찮습니다. 내 마음이 지옥이라면, 그 인연은 끊는 게 맞습니다. 우리는 소중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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