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집하] 잘못된 주소는 없다 중
사장이 돈을 안 주고 잠수를 타거나, 밀린 월급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는 일... 겪어보셨나요?
"에이, 요즘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어요?"
그쵸. 요즘 세상에...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기면 안 되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올 법한 그 일들이 계약서 한 장 없이 '믿음'과 '의리'라는 이름으로 돌아가는 위태로운 이 콘텐츠 제작 생태계에서는 꽤 흔히 생기더군요.
실제로 제 주변만 봐도 '떼인 돈 이야기'는 카페 단골 디저트입니다. 동기 PD 한 명은 믿고 따르던 제작사 대표에게 돈을 못 받아 노동청에 신고도 하고 변호사까지 알아봤지만, 결국 포기해야 했습니다. 대표가 재빨리 폐업 신고를 하고 다른 이름으로 회사를 차려버렸거든요. 법이라는 게 참 멀고도 어렵더군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불안하면서도 참 안일했습니다.
'나한테 그런 일이 생기겠어?'
네. 생기더라고요. 때는 바야흐로 2018년. '입봉(서브 작가)'을 꿈꾸던 병아리 막내 작가 시절이었습니다. 공덕역 근처 오피스텔 13층. 방 3개짜리 사무실이었죠. 하나는 대표님 방, 하나는 PD님들 방, 나머지 하나는 작가 3명이 옹기종기 모인 방.
매주 13분짜리 3편, 5분짜리 2편. <생활의 달인>에 <서민갑부>, <세상에 이런 일이> 등을 짬뽕한 듯한, 그야말로 '인간 극장' 미니 편을 매주 찍어내야 했죠. 노동 강도가 약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함께 일하는 작가님들이 너무 좋았고, 언젠가 나도 저 작가님처럼 원고를 쓸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있었으니까요.
당시 제 월급은 식대, 교통비 포함 130만 원. 네, 지금 들으면 '편의점 알바도 그것보단 많이 받겠다' 하시겠지만, 그땐 적게 받는단 생각을 못했습니다. 하지만 자취하는 지방러라 한 달이라도 밀리면 생활이 어려워졌죠. 하지만 믿었습니다. 계약서도 없이 생면부지 타인을 철썩같이 신뢰하는 아묻따(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믿음이 어디셔 생겼을까요? 당연하게도 그 믿음은 곧 배신을 당합니다. 그것도 생각보다 빨리요.
첫 징조는 성우님들의 페이부터 시작됐습니다. 녹음실 갈 때마다 성우님 얼굴 보기가 민망해질 정도로 입금이 밀리더군요. 녹음실에서도 입금이 안 됐다고 하기 시작한 후 제 차례가 왔습니다.
"나프리 작가, 미안해. 내가 지금 사업 자금이 좀 묶여서... 2주 뒤에 들어오거든? 그때 줄게."
우리 대표님,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능력자셨습니다. 제작사는 기본이고 녹음실 운영에, 망고 유통 사업, 심지어 밤에는 강남의 잘나가는 이자카야 사장님까지 겸하고 계셨으니까요. 그런데 참 이상하죠? 그렇게 사업을 문어발로 확장하실 수 있는 분이, 도대체 왜 제 코딱지만 한 월급 130만 원 줄 현금은 없으셨던 걸까요?
그때 저는 사회생활 신생아라 너무 순진했습니다. "사업하다 보면 그럴 수 있지. 딱 2주만 기다려보자" 하고 찰떡같이 믿었거든요. 하지만 대표님이 말한 2주는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더니, 눈 깜짝할 새 석 달이 지나가버렸습니다. 입봉을 위해서 참아야 할까 고민도 했지만 자취하는 지방러인 저는 더이상 참기가 힘들었습니다. 결국 3개월 치 월급이 밀린 상태에서 저는 탈출을 선택했죠.
못 받은 돈이요? 6~7년이 지난 지금까지 다 못 받았습니다. 당시 그만두고 1년 정도 후에 연락이 오셨어요. 서브 작가 자리가 비었으니 와서 하라고 하더군요. 순간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밀린 월급을 주겠다는 전화인 줄 알았는데 말이죠.
'아, 이 돈은 그냥 똥 밟은 셈 치자. 대신, 이 사람과의 일은 더이상 없다.'
나중에 들으니 저랑 같이 일했던 작가님들은 액수가 워낙 커서, 아직도 연락해서 조금씩 받아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노동의 대가는 '후불'이 아니다
편의점에서 물건 집어 가면서 "다음 달에 돈 들어오면 줄게요." 하면 바로 철컹철컹입니다. 우리의 노동력을 외상으로 파는 일에 익숙해지면 안 됩니다.
돈이 멈추면, 인연도 멈추세요. "며칠만 기다려줘"가 두 번 이상 반복되면, 그 회사는 기울어가고 있다는 신호를 주고 있는 겁니다. 못 받는 돈의 액수가 적을 때 손절하는 게 가장 싸게 먹히는 거란 거 잊지 마세요!
받을 돈을 포기하는 건 '패배'가 아니라 '손절 비용'이다
떼인 돈을 받으려고 진흙탕 싸움을 하다 보면 돈보다 더 소중한 내 멘탈과 시간이 망가질 때가 있습니다. 액수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그리고 상대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과감하게 털어버리는 것도 방법입니다. 내 인생에서 저런 사람을 영원히 치워버리는 청소비 냈다고 생각하세요. 똥을 피하는 건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니까요. 그 시간에 내 가치를 알아주는 새로운 곳을 찾는 게 훨씬 남는 장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