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분류]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中
재료 손질 끝, 이제 프라이팬을 잡을 시간입니다
방송 작가의 세계에는 ‘입봉’이라는, 업계 밖 분들은 고개를 갸웃할 은밀한 단어가 존재합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데뷔고, 적나라하게 말하면 ‘이제 제 밥벌이는 스스로 할 줄 아는 상태’를 뜻하는 업계 비속어죠. 30초짜리 짧은 스팟 영상이든, 2분짜리 예고편이든, 혹은 10분 내외의 코너 대본이든, 메인 작가님의 컨펌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누구도 도움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구성을 오롯이 내 힘으로 완성해 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입봉했다"라고 말합니다.
방송 작가 시스템은 보통 ‘메인-서브-막내’라는 견고한 피라미드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요리로 치자면 막내 작가는 묵묵히 재료를 다듬는 주방 보조와 같습니다. 섭외 전화를 돌리고 자료를 찾는 등 글쓰기에 필요한 온갖 재료를 씻고 자르고 준비하는 일이죠.
그러다 서브 작가가 되면 비로소 프라이팬을 잡게 됩니다. 막내가 준비해 준 재료들을 가지고 어떤 요리를 만들지 레시피(구성안)를 짜고, 맛깔난 한 접시(대본)를 완성해 내는 능력이 필요한 겁니다. 그 위에는 산전수전 다 겪은 메인 작가가 5~60분짜리 다큐멘터리 전체를 지휘하며 코스 요리를 완성하고요. (물론 예능국엔 ‘왕메인’ 아래 서브 메인이 있고 그 아래 수많은 서브와 1명의 막내가 북적이는 거대 주방이 존재하지만 말이죠.)
요즘은 방송국마다, 또 시대에 따라 이 주방의 풍경도 제각각입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건, 막내에서 서브로 넘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입봉’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작가마다 입봉하는 과정이 다 다른데요. 보통 방송국에서 막내 생활을 시작한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입봉의 기회를 노립니다. 가장 흔한 루트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돌아가는 생방송, 즉 ‘데일리 프로그램’입니다.
저는 J*BC에서 막내 생활을 했는데 당시에는 데일리 방송이나 건프를 안 했기 때문에 갈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었습니다. 그럴 때 찾는 방법이 외부 제작사죠. 아침/저녁마다 하는 데일리 프로그램이 있는 방송국도 본사에서 제작하는 건 특정 요일 한팀이고 보통은 다 외부 제작사들이 만들 거든요. 데일리 프로그램이 아니라도 입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곳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데일리 프로그램으로 입봉합니다. 하지만 저는 데일리 프로그램이 싫어서 입봉할 수 있는 다른 곳들을 수소문했습니다.
데일리 프로그램을 가기 싫었던 단순한 이유는 힘들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ㅠ 주 1회 밤샘은 기본 옵션에, 피 말리는 시청률 경쟁, 아이템 하나를 두고 벌어지는 타 방송사와의 기싸움까지…. 그 ‘전쟁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갓 걸음마를 떼려는 병아리 작가로서 본능적인 회피 기동이 발동했거든요.
그래, 피할 수 있으면 피하자!
그래서 찾은 곳이 위클리 방송을 제작하는 곳이었습니다. 비록 월급이 제때 들어오지 않아 마음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눈물 좀 닦고요), 그곳에서 저는 5분짜리 구성을 시작으로 1년 가까이 버티며 13분짜리 대본까지 써봤습니다. 결과적으로 좋은 선배들 밑에서 내 호흡에 맞춰 글을 배우고 입봉까지 했으니, 10년차인 지금 생각해도 제 성향에 딱 맞는 ‘맞춤형 입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입봉 이후 메인 작가가 되는 길은 또 다른 정글입니다. 시사/다큐 교양 쪽에서는 입봉까지 기간이 비교적 짧습니다. 기회가 어떻게 닿냐에 따라서 천차만별인 거 같아요. 30년 전 KBS에서 막내로 시작하셨던 작가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막내에서 메인으로 바로 입봉하기도 하셨대요.
어쨌든 시사/교양 콘텐츠에서는 6~10년차 작가님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능은 좀 다릅니다. 서브 작가 생활 6-8년차는 수두룩합니다. 제가 만난 서브 메인 작가님들 중 가장 젊은 분이 40대 초반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마저도 플랫폼을 뉴미디어로 옮겨 ‘웹예능’으로 가면 또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는데요. 이 다이내믹한 이야기는 나중에 커피 한 잔 더 리필해 놓고 자세히 풀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