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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킹가위 Jun 17. 2024

'인사이드 아웃'과 '초록빛'

초록빛(폴킴)

금요일 저녁 아이들을 데리고 '인사이드 아웃2'를 보러 다녀왔다. 우리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감정들을 의인화해서 그려낸 작품인데 아이들 보기에도 그리 어렵지 않고 흥미로웠다. 마음을 의인화했다는 발상이 임제의 '수성지(愁城誌)'와 유사하다는 직업병을 느끼며 영화 관람을 마쳤다.


'엘리멘탈'을 봤을 때와 달라진 점이 있었다. 작년에는 나 혼자 엘리멘탈 여주인공 아빠의 감정에 이입해 다 큰 어른이 볼썽사납게 훌쩍거렸다. "아빠는 왜 울어? 재미있는데?"라며 의아해하던 녀석들이 이번에는 뭘 좀 알아서인지 영화를 보고 울었다! 녀석들의 감정도 자라고 있는 것을 느끼자  감동이 밀려온다.


어느 하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세상이 다 그렇게 보이기 마련이다. 아이들과 복면가왕을 시청하고 있었는데 폴킴의 '초록빛'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가면 쓴 사람이 보였다. 노래를 듣는 내내 감정에 대한 생각들이 떠나지 않았다. 


버려진 담배꽁초

흔들리는 처량함

휘청거리는 휜 맥주 뚜껑에

난 또 감상에 젖어

오늘 밤은 뭔가가 왠지 달라서

혼자 있어도 외롭지가 않아서

보고 싶던 친구를 만나

초록빛의 신호등이 밝기만 하다

서있는 저 사람도 깜빡이고 서있지만

부딪히는 바람도 평화롭구나

내 마음이 변해서 더 그런가 해

흔들리는 바람에 휘날리는 나무도

내 마음을 간질여 예전의 나를 돋는다


폴킴, <초록빛> 중에서


문학 노래방은 1절 매너를 준수합니다.


인간 내면의 성장이 차츰차츰 단계적으로 이뤄지는지 아니면 어느 한순간 아하!하고 깨닫게 되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버려진 담배꽁초나 병맥주 뚜껑이 찌그러져서 아무렇게나 버려져있으면 문득 나와 같다고 느끼며 처량해지는 순간들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오늘 밤은 평소와 달리 흔들리고 휘청거리는 마음 대신 뭔가가 달라 보인다. 나와 달리 세상은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한 것을 보며 문득 뭔가를 깨닫는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중 기다리는 신호등 안에는 깜빡거리며 서 있는 초록빛의 사람이 있다. 뭔가를 재촉당하는 눈치다. 그도 나와 같이 불안에 떨며 흔들리고 있지만 분명 초록빛은 밝게 빛나고 있다. 밝은 초록빛의 용기를 내 세상을 바라보니 날 흔들기 위한 바람마저 평화롭게 느껴진다. 바람에 춤추는 나무가 마음을 살살 어루만져 예전의 나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있을 수 있게 한다.  


사실 '돋다'는 목적어를 취할 수 없다. 그 사동형인 '돋운다'가 맞겠지만 음성 모음이 주는 특유의 어둡고 둔탁함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아 문법을 배신했다. 우리 감정과 마찬가지로 문학과 문법은 양립이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시적 허용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지금의 나도 뭔가를 끄적거리면서 새로운 세상과 마주하고 있다. '사십춘기'에 접어들어 세상이 초록빛이었다는 걸 새롭게 느끼는 중이다. 부디 깜빡거리는 고통 속에서도 그 빛깔만큼은 간직하고 살 수 있었으면 한다. 누군가는 빛을 찾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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